시간은 어느 때보다도 빨리 움직인다. 그 옛날 시계추가 처음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보다 천 배는 서둘러 지나가는 것 같다. 작년과 올해의 틈, 진공의 협곡을 점프하기라도 한 건지 유예 없이 턱 밑으로 들이닥친 시간은 눈 뜨고도 믿을 수 없다.
한 해의 초입에서 우울하지 않게 계절을 맞고 싶었는데, 재빠르고 별난 세상에서 어쩐지 혼자만 흐물거리는 기분이 든다. 그 사이 친구들도 하나같이 뼛속 깊이 고갈된 것 같아 보였다. 무대를 잃고 폐쇄된 가수 친구는 수분 없는 베이스 톤으로 말했다. “다 타버리고 재가 되어버린 기분이야….” 사람들이 찾아 주어야만 콩을 더 볶을 수 있는 커피 집 사장, 휴대폰이 녹아 내리도록 사시사철 정신 없는 제약회사 간부, 아무리 세일을 해도 아무도 안 온다는 구제 옷 가게 주인, 구강처럼 텅 빈 공간에서 종일 기구만 손 보는 헬스 센터 관장의 시름은 각기 다르면서도 어쩌면 그렇게 일목요연한지 번번이 놀라웠다. 어제 동네 마트에서 불어오던 동네 형의 한숨과 오늘 아침 구글에서 본 독일인의 고뇌는 그저께 밀라노의 방직 회사에 다니는 친구의 좌절을 닮았으니, 오늘의 세계는 국경도 없고 지체 되지도 않아 모두가 같은 대혼란에 휩쓸려버렸다.
이것은 내가 기억하는 세계가 아니었다. 저 먼 데서 흐리게 보이던 파도가 한 덩어리로 떠밀려오자 서양의 정원은 문 닫을 시간이 되었고, 중국 발 소용돌이는 정 없이 세상을 짓이긴다. 꽉 막힌 배수구 같은 이 시절을 보낸 뒤, 연옥의 어딘가에서 베드로 문지기가 지난 1년에 대해 말해 보라고 다그치면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 어떡해서든 살아보고 싶었지만 그게 맘 같지 않더라고 화라도 낼까?
게다가 독보적인 한국인의 삶. 상스러운 따분함과 미적인 혐오감, 평등의 불공정함과 불공평함, 질서정연하게 물어뜯는 신앙과 반증, 어디에 힘이 있고 어떻게 작동하는지가 번연히 보이는 채 계속 형태만 바꾸는 시민 분류 시스템….
시간의 독재 속에서 가장 많이 생각한 것은 유한한 삶 속에 무엇이 최우선인가에 대해서였다. 사랑일까? 순위의 윗자리이긴 해도 그건 아니다. 내 자신? 말도 안 되고, 너무 이기적이다. 하늘 높이 구름 위에 사는 분? 아무리 사랑하고 싶어도 그렇진 않다. 인류의 공공선? 이타적이기는커녕 당장의 이기심만 채우기 바쁜 내가? 지혜도 자비도 아니다. 인내심, 통찰력, 연민 같은 행복한 허튼 소리도 최우선은 아니다. 역병의 공습이 압도적인 이데올로기가 된 지금 어떤 가치도 “언제쯤이면 행복해질까?”라는 미스터리만큼 우선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는 또 하나의 공산품에 불과하고, 종교가 된 휴머니즘은 현대 과학의 도그마에 그쳤으며, 예술은 단지 수학적 패턴을 인식하는 유기적 도형의 하나인데다, 최후의 승자는 우리가 아닌 데이터 이론이라는 전망이 모두를 포박한다. 과학은 우리에게 자유 의지란 없고, 실시간 인공지능(AI)화된 생리적 데이터 접근이 나보다 나를 더 잘 알며,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단지 알고리즘일 뿐이라고 윽박지르는데, 어쩐지 반박할 논리도 에너지도 없다,
어떻게 이렇게 됐을까. 수년 전, 현대 테크놀로지로 무장한 수퍼 휴먼이 우리 가까이 왔다는 관측이 당장 오늘 내일인 듯 넘실댈 때, 다들 불사의 신이 될 거라는 희한한 공포를 느꼈다. 한편, 그 뒤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후손들은 어떻게 될까, 사춘기 소년처럼 공상도 했었다. 그렇지만 이제 인간은 모든 것에 새로 적응해야 하는 동물들, 생각보다 고평가 된 종족들, 속물의 시대를 헤엄치는 포유강 영장목으로만 보인다.
가끔 돈키호테처럼 묻는다. 인간의 고귀함은 착각일까? 위대한 가치는 망상일까? 손짓하는 희망이란 어두운 역사의 끝에서 퇴화해 버렸나? 성급한 패배감이 들 때 삶의 시각을 잃지 않고 확신을 지키는 방법이 따로 있을까?
은행 나무가 보이는 작은 교차로에서 파스타 집으로 동네의 자랑이 되었던 친구도 며칠 전 문을 닫았다. “그 동안 별의별 일 다 겪고 그 고생을 했는데 이번만큼은 못 버티겠더라.” 전체 인생을 다시 뒤흔들어야 하는 친구가 쓱 웃어 보이자 침울한 진흙빛 주위가 약간 방심해 보였다. 이런 상황에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아무도 못 찾는 정답을 누가 발명해줄까? 나는 한국 말을 다시 배워야 했다.
이마가 소슬한 현자는 말할 것이다. 절망적인 상황이 아무리 길어도 결국 끝은 온다고, 살아있다는 것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라는 의미이고 그 다음은 자연의 손에 맡기라고, 이 모든 일이 생기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일어난 게 아니며 삶은 이대로 완전하다고.
심리학자들은 떠도는 생각, 집착적인 반추, 신체의 과부하가 매번 우리를 짓누를 때 마음을 원래대로 두면 익숙한 연상의 길을 따라가는 경향이 있다고 추정한다. 오갈 데 없어도 인생은 자동항법으로 우리를 어딘가로 데려가 준다고.
한편, 우리가 처음 겪는 타격으로 치명상을 입었을 때 이런 말을 해주는 이들은 주변에 꼭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이 상황이 다르게 보일 거야. 우린 고난을 통해 어떤 교훈을 얻어야 돼.” 그러나 의도야 어쨌든 “시간이 지나면” 이란 말은 지금 내가 이해하는 것이 온통 부조리하다고 냉정하게 저격하는 것 아닌가. 나중에 보면 그럴듯해 보였던 충고들은 항상 희멀건 한 횡설수설일 뿐이었다. 우리가 누구인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무슨 노래를 부르고 싶은지는 부처 카운셀러가 귀띔하지 않아도 진작에 다 알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마음이 접질린 내 앞에서 누가 냇물에 씻은 말짱한 얼굴로 구름 빵 같은 소리나 하고 앉았으면 당장 그 입을 걷어차 주겠다. 그런 따분한 훈수, 신빙성 있어 뵈는 통계, 마음 좀 쓴 듯한 조언은 익히 다 아는 내용이니까. 솔깃한 듯 하나마나 한 소리들은 한심한 매체들이 서로 베껴가며 이미 어그로를 끌고 있으니까.
어떤 의미로 작년에 나는 유별나게 더 살아 있었다. 주종을 바꿔 와인 대신 맥주를 사는 계산대 앞에서, 지적이고 싶은 잡식 동물인 채 책을 이야기하는 조그만 방에서, 책 대신 술이 주인이 된 알록달록 서재에서, 혈액에 문제가 생겨 이따금 들렀던 진료실에서. 특히 나를 화나게 했던 사람이 사과하길 기다릴 때 대미지를 입은 마음이 유독 날뛰었다. 시간이 늦었는데 친구가 너무 느리게 걷거나, 택배 배송 날짜가 한도 끝도 없이 지연되거나, 열이 받아 아무 것에도 집중할 수 없는 호전적인 순간, 나는 어느 때보다도 살아 있었다. 왜냐하면 그 순간은 내 마음을 다독이는 수단이 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생의 리듬을 한꺼번에 변검하듯 바꾸고 싶어 하지만 꿈은 한 번에 한 걸음씩 현실로 다가온다는 사실을 자주 잊는다. 동시에 쾌락론(행복과 관련된 것)을 쾌락주의(원리로서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로 혼동한다. 뿌리가 같으나 광년만큼 떨어진 단어들을. 그러나 여행이란 한 장소에서 다음 장소 사이에 패인 공터가 아닐 것이다. 언제 특이점이 찾아오고 다시 행복해질 수 있을까, 하는 예측이 무엇이든 우리는 당장 오늘 해야 할 일을 알고 있다.
아파트에서 비탈이 있는 작은 주택으로 이사한 친구는 마당에 당근을 길렀다. 그는 폭신한 녹색 싹이 올라오는 걸 보고 너무 흥분한 나머지 당근이 땅속에 얼마나 컸나 궁금하다면서 그걸 쏙 뽑아버렸다. 그때 느꼈다. 시간이 적당한 때를 마련하기 전에 노고의 결과를 미리 따지지 말자고. 아기 당근을 뽑거나, 이제 막 핀 꽃을 잡아 떼거나, 유충 더러 어서 번데기가 되라고 재촉하면 안 된다고. 그냥 씨를 뿌리고, 가꾸고, 물을 주고, 그대로 두면 된다고. 미래가 눈앞에 보이지 않아도 꿈이 자라는 동안에는 평화가 있을 거라고. 지금 딛고 선 대지를 인식하는 순간보다 고요할 수 있다면, 좀 더 많은 꽃을 보게 될 거라고.
여기까지 쓰고 보니 지구가 망해도 사과나무를 심자던 스피노자류의 다 아는 소리만 한 것 같다. 하지만 복잡해 보이는 진실도 실은 이렇게 단순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저녁이 오면 파스타집을 하던 친구의 말이 자꾸 생각난다. 그건 부드러운 힘으로 스스로를 격려하는 이의 심리학적 백신 같았다.
“어떤 때든 좋고 나쁜 순간이 있어. 그렇지만 우리는 단지 좋은 순간을 기억하면 되는 거야.”
에세이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