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입국 뒤 격리시설로 끌려간 한국인 수십 명이 12시간만에 풀려났다. 함께 입국한 외국인 70여명은 여전히 강제 격리시설에 붙잡혀 있다. 어떻게 한국인만 빠져나올 수 있었을까.
사건은 지난달 29일 벌어졌다. 이날 오후 9시30분과 10시30분쯤 한국인 31명 등 100여명이 마닐라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이들은 다음날 오전 4시까지 공항에 붙들려 있다가 대형 버스로 이송됐다. 휠체어를 탄 어린이와 노인도 있었다.
이들이 오전 7시쯤 도착한 곳은 마닐라에서 80㎞나 떨어진 바탕가스의 한 호텔이었다. 6일 현지 매체에 따르면 호텔은 물도 제대로 나오지 않고 인터넷도 없는 열악한 상태였다. "천장은 곰팡이 천지, 실내는 쓰레기장", "체르노빌 원전 사고 현장 같다"는 탄식이 터져 나왔다. 한 외국인은 "우리는 격리된 게 아니라 인질로 붙잡혔다"고 불평했다. 한국인 31명 중 6명은 온라인 수업을 들어야 하는 학생이었다.
필리핀 주재 한국 대사관이 발 빠르게 나섰다. 이날 오전 7시30분쯤 김인철 대사 지시에 따라 이규호 총영사와 윤원창 경찰영사는 직접 시설로 달려가 물과 도시락, 마스크 등을 전달했고, 필리핀 외교부와 보건부 관계자들을 설득했다. 결국 이날 오후 6시50분쯤 남길 원하는 2명을 제외한 한국 국적자 29명과 배우자가 한국인인 영국인 1명은 대사관이 대절한 버스 2대에 나눠 타고 각자 예약한 호텔로 이송됐다. 나머지 70여명은 여전히 해당 시설에 묶여 있다.
우모(45)씨는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공관에서 잘 섬겨주셔서 감사하다"라며 "우리나라 대사관의 힘을 제대로 느낀 하루였다"고 했다. 현지 매체는 "한국 대사관만 자국민들을 지옥 같은 상황에서 즉각 빼내왔다"고 보도했다.
필리핀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변이 확산을 막기 위해 지난달 30일 오전 1시부터 이달 15일까지 한국 등 20개국으로부터의 입국을 금지한다고 지난달 28일 발표했다. 입국 금지 직전 들어온 승객은 14일 시설 격리를 해야 한다고 밝혔으나 명확한 기준이 현장에 전달되지 않았다. 기존처럼 각자 예약한 호텔에서 격리할 줄 알았던 외국인들이 항의했으나 당국은 지정시설 격리를 고집했다. 필리핀 현지 매체조차도 정부의 안일한 대응을 질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