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 탄 왕자가 공주를 구한 건, 놀고 먹기 위해서였다

입력
2021.01.09 04:40
12면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과학을 읽습니다. 역사 에세이스트 박신영 작가는 '백마 탄 왕자' 이야기에서 장자상속제의 문제를 짚어보는 등 흔히 듣는 역사, 고전문학, 설화, 속담에 배어 있는 성차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번갈아 글을 쓰는 하미나 작가는 과학사 전공자답게 2030 여성의 건강문제, 덜 눈에 띄는 여성의 산업재해 문제 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여자들은 이래서 문제다.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지 말고 능력을 키워라.’ 어릴 적에 공주가 나오는 동화책이나 순정 만화를 보면 듣던 말이다. 학교에서 선생님들은 나와 내 친구들을 야단쳤다. ‘여학생들은 얼굴 꾸며서 시집간 후 놀고 먹을 생각만 한다. 거울 볼 시간에 공부해라.’ 집에서 부모님은 오빠와 남동생을 우대하며 말했다. ‘딸들은 시집가면 그만이니 투자하면 부모 손해다. 그래서 차별하는 거다’라고. 과연 그런가? 우리 여자애들이 차별받는 이유는 공부 안 하고 남자에게 빌붙어 놀고 먹으려고 하기 때문인가? 무언가 억울했지만 당시 우리에게는 새로운 이야기가 없었다. 20세기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남녀 공학 중학교로 배정받았다. 출석부의 1번에서 32번까지는 남학생이었고 41번에서 62번까지는 여학생이었다. 여자애들은 늘 뒷전이었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상위권 남학생들은 당연한 듯 인문계로 진학했다. 대학에 가기 위해서였다. 상위권 여학생들은 달랐다. 절반 정도는 실업계 고등학교로 원서를 넣었다. 딸이니까 얼른 취업하여 오빠와 남동생의 학비를 벌어야 한다는 이유였다. 거울을 볼 시간에 영어 단어장을 보고, 헤어롤을 말 시간에 수학 문제를 풀었건만. 백마 탄 왕자나 기다리는 한심한 계집애들이라고 혼내면서도 세상은 우리에게 능력을 키울 기회를 주지도 않았다. 여전히 우리는 새로운 이야기를 찾지 못했다.

남편은 왕자가 아니라 용이었다

20대가 되어 합법적으로 ‘연애계’에 진출했다. 이성애자 친구들은 사귀는 남자들의 말에 휘둘렸다. 그들이 말하는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는 골빈 된장녀’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 말이 옳아서가 아니라, 단지 상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여 사랑받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몇 명의 남자와 만나고 헤어졌다. 데이트 폭력을 행사하던 '구남친'은 불을 뿜어 위협하던 '구남용'이었다.

나름 왕자를 골라 결혼했지만 출산과 육아로 경력이 단절되자 집은 왕년의 공주가 갇힌 성이 되었다. 용 한 쌍이 효도를 빙자한 가사 노동과 돌봄 노동, 감정 노동을 강요할 때 왕자는 구해 주지 않았다. 알고 보니 남편은 왕자가 아니라 부엌에 들어가기 무서워 소파 위에 앉아 있는 용이었다. 차별하며 키웠어도 노쇠해지자 딸의 다정한 돌봄을 원하는 친부모님도 다시 보니 용 한 쌍이었다. 아아, 용 내려 온다. 용 내려 온다.

어쩌면 왕자는 용과 한통속일지 모른다

어찌된 일인가. 백마 탄 왕자만 기다리지도 않았건만, 놀고 먹지 않고 유급 무급 노동을 해 왔건만, 어디에서 이 많은 용들이 내려오는 것인가. 대학 진학률은 같아졌는데 왜 우리 여자들은 다양한 용의 감시를 받으며 계속 차별의 성에 갇혀 있는 것일까. 안다. 용 아닌 좋은 연인과 남편, 친부모와 시부모를 만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건 랜덤 아닌가. 타인의 선의에 인생의 행복과 불행이 달려 있는 것도 갇힌 삶이다.

갇힌 사람에게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동화책과 만화책을 보던 여자애들은 자라서 소설책과 드라마, 영화, 웹툰을 본다. 새로운 이야기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원하기 때문이다. 흠, 어떤 드라마에서는 남자 주인공이 친구와 짜고 짝사랑하는 여성을 괴롭히게 한 후 구해주기도 하던데, 어쩌면 왕자와 용은 한통속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부모님도 선생님도 세상도 우리 편이 아니라 용과 짠 왕자의 편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백마 탄 왕자’ 이야기를 통해 결혼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는 한편, 차별하고 후려쳐서 용 앞으로 떠밀어 준 것은 아니었을까.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백마 탄 왕자’ 이야기는 왜 생겼을까? 처음부터 성차별적인 이야기였을까? 왕자, 공주, 용은 원래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왕자들은 조건 좋은 공주를 찾았다

괴물을 물리치고 여성을 구하는 영웅의 모험담은 전 세계에 많이 있다. 고전설화 분류 체계인 아르네-톰슨 분류 체계(Aarne–Thompson classification systems)에 의하면 AT 300번 '용 퇴치자(dragonslayer)' 유형이다. 성 게오르기우스(Georgius) 전설이 대표적이다. 군인 출신인 그는 4세기 초에 순교했다. 공주를 용에게서 구한 후 그 나라 사람들을 기독교인으로 개종시켰다. 기독교 포교 과정의 역사를 반영한 이야기이기에 공주와 결혼하지는 않는다.

성 게오르기우스는 군인이어서 임무 수행 중에 지나가다가 공주를 구했다지만, 이야기 속의 그 많은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 공주를 구하고 나서, 가던 길 가지 않고 왜 공주와 결혼할까? 근대 이전 유럽에는 작은 나라들이 많았다. 안 그래도 작은 나라를 자녀들에게 분할 상속해주면 국력이 약해진다. 영주 부모들은 첫째 왕자에게 작위와 영토를 상속해주고 다른 왕자들은 성직자나 용병대장 등이 되어 스스로 알아서 살도록 했다.

장남으로 태어나지 않았지만 왕이 되는 방법도 있다. 여왕이 될 외동 공주나 왕자가 없는 왕가의 첫째 공주와 결혼하면 된다. 그러기에 장남이 아닌 왕자들은 조건이 좋은 공주를 찾아 떠돌아다녔다. '잠자는 공주'에서 그렇게나 많은 왕자들이 공주를 구하기 위해 몰려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00년 동안이나 이를 닦지 않은 100살 연상인 여자에게 왕자가 뜬금없이 반해서 키스했던 이유도, 다 부잣집에 장가들어 편히 놀고 먹기 위해서였다. 이상이 중세 유럽사를 통해 알아낸 백마 탄 왕자의 역사적 실체다.



백마 탄 왕자, 실은 '여성 숭배'였다

고대의 ‘용 퇴치자’로는 페르세우스가 유명하다. 최고신 제우스의 아들인 그는 에티오피아를 날아서 지나가다가 바다 괴물인 용에게서 안드로메다 공주를 구해주고 결혼한다. 페르세우스 신화는 백마 탄 왕자가 용을 무찌르고 공주를 구해 결혼하는 유럽 민담의 조상이다. 낭만적 이야기로 보이지만 역사적 배경을 보면 그리스 해양 세력이 지중해 지역을 침략한 후 강제로 결혼 동맹을 맺는 과정이 보인다.

페르세우스가 무찌른 용은 그리스 인들이 침략한 지역의 원래 지배 세력이나 토착민들이 숭배하던 신을 상징한다. 승자의 신화는 패배한 쪽을 사악한 괴물로, 정복당한 민족이 믿던 신을 하급 신으로 기록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주는 왕자의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국제 역학과 정략 결혼에 희생당한 것인데, 전혀 낭만적이지 않다.

겨우 이 정도인가. 아니다. 오랜 세월 구비 전승된 이야기에는 집단 무의식이 담겨 있다. 이렇게 오랫동안 인류가 ‘백마 탄 왕자’ 이야기를 즐겨 왔다면 이유가 있을 것이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보자. 청동기 시대에 지중해 지역에는 동지 즈음에 땅 속에 갇혀 있던 태양을 구출하는 의례가 있었다.

땅 속의 신에게서 태양을 구출하는 신화는 점차 괴물에게 잡혀 있는 여성을 구출하는 기사의 이야기로 변해갔다. 태양은 아름다운 여성이, 커다란 뿔로 태양을 운반하던 우주 사슴은 말이 되었다. 말 중에서도 백마인 것에도 이유가 있다. 흰색은 색채가 없기에 백마는 형체가 없어서 하늘과 저승이란 두 세계를 오고갈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백마 탄 왕자’ 이야기의 근원은 태양 숭배였다. 태양이 없는 상태가 상징하는 공동체의 결손을 원래대로 회복하여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주제였다. 오오, 유레카, 유레카!

너희 왕자들은 왜 공주를 구하지 않는가

유레카를 외치며 용의 탕에서 뛰어나와 둘러보니, 새로운 이야기를 찾는 이들이 보였다. 늘 싸워 온 여성들은 있었다. 21세기 들어 눈에 띄는 변화가 생겼다. 디즈니의 공주 애니메이션도 바뀌기 시작했다. 여성들은 손 잡고 새로운 이야기를 요구하고 써 나갔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생겼다. 이제는 왕자를 꿈꾸지 않는 여성들이 욕 먹기 시작했다. 2016년, "소녀들은 왕자가 필요없다(Girls do not need a prince)"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었다는 이유로 분노한 남성들이 항의해서 성우가 해고당하기도 했다. 아니, 남성들이 진정으로 여성을 구원하는 왕자가 되길 원한다면 그 많은 성범죄는 누가 저지르는 것인가? 2020년의 n번방 사태는 왜 벌어졌는가? 무려 26만여 명이나 되는 텔레그램 성착취 범죄 동조자들은 다 어디에서 내려온 용들인가? 현대의 왕자들은 용에게서 공주를 구하지 않고 용이 범죄를 저지르는 영상이나 공유하고 있는가? 왕자와 용은 한 편인가? 왕자 아닌 용이 되어 ‘낫 올 맨! 모든 남자가 다 그렇지는 않아!’라고 불을 뿜고 있는가? 이 용들이 뿜는 불(火)은 일반화인가?



어릴 때 우리는 ‘백마 탄 왕자’ 이야기를 굳이 성별을 나눠서 읽지 않았다. ‘나는 공주가 되어 잠자다 구원받아야지’, ‘나는 왕자가 되어 공주를 구해야지’라고 다짐하지 않았다. 단지 악을 물리치고 선이 승리하는 이야기를 좋아했을 뿐. 그렇다.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은 공동체의 정의 회복이다. 우리에게는 젠더 정의를 위해 다른 이야기가 필요하다. 새해가 밝았다. 21세기도 1/5이나 지났다.


박신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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