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가 이른바 '정인이법'을 경쟁적으로 발의하고 있다. 그러나 국회는 지난해 '아동학대처벌법'을 고칠 결정적 기회를 4번이나 흘려보낸 것으로 확인됐다. 한국일보가 6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회의록을 분석한 결과, 법사위 전체회의와 법안소위에 여야 의원들이 낸 다양한 버전의 아동학대처벌법 개정안이 상정된 것은 지난 1년간 모두 4차례다.
해당 회의 속기록에 따르면, 여야 의원들은 '아동' 자도 입에 거의 올리지 않은 채 법안들을 흘려보냈다. 대신 '추미애' '아들' '검찰' '공수처' 같은 정쟁의 단어가 속기록을 채웠다.
더구나 해당 개정안 처리에 대해선 정부 부처들이 모두 찬성하는 등 이견이 별로 없었다. 국회가 아주 조금의 관심만 기울였다면, 뒤늦게 호들갑 떨지 않아도 됐을 거란 얘기다.
정세균 국무총리 주재로 5일 열린 '입양아 학대 사망 사건(정인이 사건)' 관련 관계부처 장관회의에서 잠정 결정한 ‘아동학대 대응 8대 대책’ 중 3개 대책은 지난해 발의된 법안에 이미 들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과 아동학대 전담 공무원이 조사 과정에서 출입할 수 있는 장소를 확대, 피해 아동을 적극 보호할 수 있게 하는 조치를 담은 법안은 3번이나 발의됐다. 지난해 7월 이후 더불어민주당 신현영·임호선 의원과 국민의힘 김정재 의원이 차례로 냈고, 이후 법사위 소위에 2번 전체회의에 1번 상정됐다.
정부 조치 중 △아동학대 발생 시 유관기관 협조를 강화하는 내용 △아동학대 신고 의무자를 확대하는 내용 등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여야는 해당 법안을 법사위에서 단 1분도 논의하지 않았다.
여야 의원들이 최근 나흘간 쏟아낸 아동학대처벌법 개정안은 9개. 지난해 발의된 30여개 법안들과 내용이 대동소이하다. 여론을 의식해 뒤늦게 법안을 '복붙'하고 있는 셈이다.
지난해 7월 27일과 8월 25일 법안소위 속기록을 보자. ‘추 장관 아들’은 이틀간 평균 30번씩 언급됐으나, '아동학대처벌법'은 한 번도 거론되지 않았다. 4시간 42분간 진행된 7월 소위에선 추 장관의 “소설 쓰시네” 발언을 놓고 여야 법사위원들이 싸우느라 법안 심사는 제대로 하지 못했다. 4시간 30분간 열린 8월 소위에선 추 장관 아들 군 복무 특혜 의혹과 관련해 ‘군 휴가 규정’을 정부에 질의하는데 회의 시간을 거의 다 썼다.
9월 21일 법사위 전체회의에서도 아동학대처벌법은 뒷전이었다. 이날 회의엔 총 8건의 아동학대처벌법 개정안이 안건으로 상정됐지만, 회의가 진행된 5시간 38분 동안 여야 의원 중 아무도 법안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추 장관의 아들 휴가 문제는 94번 거론됐고,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는 179번 언급됐다.
11월 18일 법사위 법안소위엔 6건의 아동학대처벌법이 상정됐다. 그러나 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안 등 부동산과 관련된 질의에 묻혔다. 회의 시간 5시간 25분은 허무하게 흘러갔다.
아동학대처벌법 개정만으로 정인이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 거라고 단정할 순 없다. 그러나 이미 발의된 법안은 묵혀 두고 여론의 주목을 받기 위해 법안을 또 내는 건 결과적으로 직무유기이자 낯뜨거운 호들갑이다.
국회 법사위 관계자는 6일 한국일보와 통화에서 “'사법경찰관과 아동학대 전담 공무원의 현장 출입권한 강화'를 담은 아동학대처벌법 개정안은 심사 과정에서 소관 부처인 법무부, 경찰청, 보건복지부 등이 전부 찬성해 어렵지 않게 통과될 수 있었다”며 “경찰이 정인이 사건을 3번이나 조사를 했는데, 진작 법안이 통과돼 집 말고 다른 장소까지 꼼꼼히 챙겨 봤더라면 어땠을까 싶다”고 했다.
다른 법사위 관계자도 “법사위에서 아동학대처벌법을 단 1분이라도 논의했다면, 현장에서 작동할 수 있는 절충안을 찾아낼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