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출하지 않은 신체 부위 또는 노출한 부위라 하더라도, 자신의 의사에 반해 촬영 당했다면 성범죄에 해당한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은 성적수치심은 부끄러움만이 아닌 다양한 층위의 피해감정을 포괄한 개념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대법원 1부(주심 김선수 대법관)는 성폭력처벌법 위반(카메라 등 이용촬영)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의정부지법으로 돌려보냈다고 6일 밝혔다.
A씨는 2018년 버스에 타고 있던 여성의 뒷모습을 8초 동안 몰래 촬영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1심 재판부는 A씨 촬영 행위를 유죄로 인정해 벌금 70만원을 선고했다. 그러나 항소심은 1심 판단을 뒤집고 2019년 A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촬영된 신체가 ‘카메라 등 이용 촬영죄’에서 말하는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신체’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항소심 재판부는 피해 여성이 입고 있던 레깅스를 지목하며 “레깅스는 피해자와 비슷한 연령대의 여성들 사이에서 운동복을 넘어 일상복으로 활용되고 있다. 따라서 레깅스를 입은 젊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성적 욕망의 대상이라고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이어 “특별히 엉덩이 부위를 확대한 건 아니고 사람 시야에 통상적으로 비춰지는 부분을 그대로 촬영한 것”이라고 밝혔다. 피해자가 경찰조사에서 “기분 더럽고, 어떻게 저런 사람이 있나, 왜 사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심경을 드러낸 것에 대해선 “피해자의 불쾌감이나 불안감을 넘어 성적 수치심을 나타낸 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항소심 판결 이후 이에 반발하는 여론이 커지면서, 이 사건은 ‘레깅스 판결’이라 불렸다. 재판부가 피해 사진을 판결문에 첨부한 사실까지 알려지면서 “법원이 2차 가해를 했다”는 비판도 나왔다.
대법원은 그러나 ‘성적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신체’와 ‘성적 수치심’에 관한 정의를 내리며 항소심 판결을 전면 비판했다. 재판부는 “카메라 등 이용 촬영죄에 따른 처벌 대상은 반드시 노출된 신체를 촬영한 경우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고 못박았다. 이어 “피해자가 공개된 장소에서 자신의 의사에 의하여 드러낸 신체 부분이라 하더라도 ①동의 없이 촬영 당했을 때는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이 유발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통상적인 모습이라 하더라도 ②그것이 촬영된 이상 전파가능성, 변형가능성 때문에 인격권을 중대하게 침해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성적수치심에 대해 ③“반드시 부끄럽고 창피한 감정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분노ㆍ공포ㆍ무기력ㆍ모욕감을 비롯한 다양한 층위의 피해감정을 포섭하는 개념”이라고 적시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카메라 등 이용 촬영죄의 보호법익이 ‘자기 의사에 반해 성적 대상화가 되지 않을 자유’임을 최초로 명시하고, ‘성적빡치심’ 같은 다양한 피해감정이 존중받아야 함을 강조한 판결”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