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1월 8일 박정희 권위주의 독재정부가 긴급조치 1호를 발호(發號)했다. 7개항 주요 내용은,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비방하거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하는 일체 행위, 유언비어 유포 날조 행위, 또 그런 사항들을 여러 방법으로 타인에게 알리는 행위에 가담한 자를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할 수 있고, 비상군법회의에서 15년 이하 징역에 처한다는 거였다. 그 헌법이 1972년 10월 비상국무회의가 의결한 제4공화국 헌법, 즉 유신헌법이었다.
유신헌법 53조는 "대통령은 천재지변 또는 중대한 재정 경제상의 위기에 처하거나 국가 안전보장 또는 공공의 안녕질서가 중대한 위협을 받거나 받을 우려가 있어 신속한 조치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할 때에는 내정 외교 국방 경제 재정 사법 등 국정 전반에 걸쳐 필요한 긴급조치를 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물론 이전에도 1967년의 동백림사건, 1968년 통혁당 사건, 1970년 김지하 필화사건 등 자유를 억압하는 권력의 횡포는 거침없었지만 긴급조치는 감시-통제-억압의 그물을 더 촘촘히 전면적으로 펼치겠다는 선언이었다.
긴급조치 이후 노동운동 학생운동 정치활동은 물론이고, 평범한 시민의 술자리 푸념, 버스 안 농담, 낙서 한 줄이 빌미가 돼 영장 없이 끌려가고 폭행 고문 당하고 억지 자백으로 '빨갱이'가 돼 실형을 살고 그 이력이 블랙리스트로 남아 취업도 못하는, 한 가정이 몰락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긴급조치는 1975년 5월의 제 9호까지 이어지며 그물망을 더욱 정교히 하다가 1979년 10·26 이후 사라졌다. 대신 1980년 헌법이 개정되면서 비상조치란 이름으로 국회 사후 의결이란 조건을 붙여 부활했고, 1987년 개정 헌법으로 대통령 '긴급명령권'이라는 합당한 조건과 절차 및 효력을 규정한 조항으로 개선됐다.
그 엄혹한 시절의 빛나던 투사들이, 또 그들과 친분이 돈독했던 다수가 그 이력을 밑천 삼아 오늘의 권력집단이 됐다. 그중 다수는 비루해졌고, 일부는 미심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