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자락의 경남 함양군 지곡면 개평마을은 수백년 대물림 고택이 즐비한 한옥마을이다. 시대극 촬영장을 연상케 하는 60여채의 기와집들이 마을을 형성해 '개평 한옥마을'로 불린다. 예부터 '좌(左)안동 우(右)함양'이란 말이 있었듯 함양은 걸출한 선비들을 많이 배출한 대표적 양반고장이다.
양반고을 함양을 대표하는 개평한옥마을에는 '자갈한과'가 있다. 맥이 끊길 뻔한 선조들의 주전부리문화를 이 마을이 이어가고 있다. 함양을 전국에 알리는 데에도 톡톡히 역할을 하고 있다.
자갈한과는 한옥마을 주민들의 작품이다. 마을 명색에 걸맞은 전통 먹거리를 찾아보자 데 주민들의 의견이 모아져 시작됐다. 마침 집에서 근근이 그때 그시절 자갈한과의 맥을 이어 오던 오점덕(70) 할머니가 앞장서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마을회관 한 켠의 노는 공간을 작업장으로 만들어 솥단지를 걸고 자갈한과 재현에 나서기 시작한 건 지난 2005년. 자갈한과는 한옥마을을 찾는 관광객들의 입소문을 타면서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떨치기 시작했다. '함양은 몰라도 개평마을 자갈한과는 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스타'가 됐다.
길게는 몇 세대가 대물림하는 여느 노포와 달리 마을 차원에서 잊혀 가는 전통 한과의 맥을 이어 가고 있다는 점에서 개평마을 자갈한과는 그 대물림 의미가 남다르다.
그 독특한 이름처럼 자갈한과는 세상의 여느 한과와 다른 점이 여럿이다. 전통 과자인 한과는 주로 식용유에 튀기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 마을 한과는 뜨거운 자갈로 구워 만든다. 제조방식도 이 마을 대대로 내려온 옛날 방식 그대로, 손으로 만들어지는 수제 과자다.
자갈한과의 또 다른 이름은 '미안한 한과'다. 전국에서 주문이 몰리지만 그들 모두에게 맛보일 수 없어서다. 마을 할머니들이 농한기를 이용해서 겨울 한 철 두 달여 동안 한시적으로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주문 물량를 소화해내기엔 현재로선 불가능하다.
7일 오전 개평마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마을회관 한 켠에 마련된 한과작업장에서는 7명의 할머니들이 분주한 손놀림으로 추위를 몰아내고 있었다. 작업장이라 할 것도 못되는 좁은 공간이지만 장작을 떼는 화덕 위에 걸쳐진 무쇠 솥뚜껑이 개평마을 자갈한과의 '특별함'을 직감하게 했다.
이글거리는 장작불 위에 놓인 솥뚜껑에는 반들반들 윤이 나는 콩알 만한 자갈이 열기를 뿜어 냈고, 하얀 '물체'가 연신 자갈을 비집고 올라오자 할머니들은 요리조리 주걱을 움직이며 반듯한 모양으로 부풀려 가며 구워 냈다. 반죽을 둥글 넓적하게 펴서 만든 반대기가 자갈 위에서 구워지는 것이다. 부푸는 반대기를 탄 자국 하나 없이 반듯하게 노릇노릇 구워내기까지 과정은 보기엔 쉬워도 만만찮게 손길과 정성이 들어갔다.
식용유 역할을 하는 자갈은 동네 하천에서 맞춤한 돌을 주워 깨끗하게 씻은 뒤 소금을 넣어 50분가량 볶았다. 소금은 천연소독제 역할을 한다. 이렇게 볶은 자갈은 뜨끈한 물에 한 번 더 헹궈 바람에 말린다. 찹쌀과 콩 등 한과에 들어가는 재료는 모두 이 마을에서 생산한 농산물이다.
'바탕'이라고 불리는 한과 반죽도 재료와 비율 맞추기도 비법 중 하나다. 물에 적당히 불린 콩과 찹쌀을 넣고 빻아 가루를 만들며, 여기에 '비장의 무기'인 막걸리를 섞어 버무려 반죽을 완성한다.
작업반장 이효선(64) 할머니는 "일반 한과에 잘 사용하지 않는 막걸리는 천연 발효제 역할을 하며, 반죽이 잘 부풀어 오르게 숙성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고 귀띔했다. 또 "콩가루는 쫀득한 표면에 고소함을 스며들게 해 맛의 깊이를 더해준다"고 전통비법을 소개했다.
이렇게 완성된 반죽은 찜통에 넣고 찐 뒤 골고루 펴 가며 납작하게 반대기를 만들어 말린다. 건조 과정을 거친 반대기는 비로소 장작불 위 무쇠솥에 잘 달궈진 자갈의 열을 받아 튀겨진다.
장작불 지피기도 적당한 온도를 유지하려면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온도계로 재지는 않지만 첫 불을 지필 때는 30~40분가량 센불로 자갈을 달군 뒤 섭씨 160도 가량의 적정온도를 유지하는 게 비법이다. 온도가 너무 높으면 물을 뿌려 식혀 주는데, 이 과정도 오로지 오랜 경험에 의존한다.
자갈한과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반대기 굽기는 화덕 주위에 4명의 할머니들이 옹기종기 둘러 앉아 요리조리 묻었다 꺼내기를 반복하며 뒤집는 정성이 들어간다.
제대로 된 한과를 만들기까지 시행착오도 많았다고 한다. 오점덕 할머니는 "적당히 달궈진 자갈을 덮고 10초가량 뜸을 들이면 반대기가 부풀어 오르는데 다섯 번 정도 뒤집기를 반복하며 타지 않도록 골고루 구워 내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렇게 노르스름하게 구워진 반대기는 작업장 최연장자인 김복실(80) 할머니의 손으로 넘어간다. 반대기를 깨끗하게 털고 다듬어 마지막 공정인 달콤한 조청을 바르는 과정이다. 이후 튀밥 가루를 입히면 비로소 개평마을표 자갈한과가 완성된다.
기름을 넣지 않고 구워 내기 때문에 느끼한 맛이 없고, 담백하면서도 고소한 게 자갈한과의 특징이다. 또 기름에 튀킨 유과가 시간이 지나면 쳐지고 눅눅해지는 반면 자갈한과는 두고두고 먹을 수 있는 것도 매력이다.
할머니들의 정성으로 한과가 만들어지기까지는 하루 8시간을 일해도 꼬박 3일이 걸리는 고된 노동이 동반된다. 반죽하고 반대기를 만들어 말리고, 조청 끊이기와 튀밥가루 준비하기 등 재료 준비에 하루가 든다. 또 자갈에 굽고 완성하는 과정이 하루, 바삭하게 말려 포장하는 데 또 하루가 걸린다.
이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하나 할머니들의 손으로 만들다 보니 양은 많지 않아 3일에 1㎏짜리 30~40박스를 만드는 게 고작이다.
할머니들은 "한 번 만들 때 3일이나 걸리는 고된 작업이지만 전통을 잇는 자부심으로 견뎌내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한 때 13명에 달했던 한과작업반 할머니들도 세월을 이기지 못해 7명으로 줄었다.
오점덕 할머니는 "나이가 들면서 힘겨워하시는 분들이 늘고 있어 걱정"이라며 "보잘 것 없는 과자지만 대대로 내려온 개평마을 자갈한과 전통을 계속 이어갔으면 하는 게 우리 모두의 바람"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