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0마리 안내견이 일하는 나라를 위해

입력
2020.12.19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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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는 동물 중에서 유일하게 인간과 발맞춰 걸을 수 있는 존재다. 인간과 함께해온 오랜 시간 속에서 익숙해져 온 습관적인 움직임이다. 길들인 늑대도 이런 능력을 곧 습득할 수 있다고 한다. 어쩌면 녀석들의 이런 능력은 타고났는지도 모르겠다.

시각장애인의 보행을 돕는 기구를 만들려면 장애인 보행의 특성과 패턴을 분석하고 안전함을 보장해야 한다. 그런데 안내견은 어떤 인공지능(AI)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이를 자연스럽게 이해한다. 거기다 안내견과 장애인은 서로간 상호작용을 통해 심리적 안정까지 얻는다. 익숙한 길에서 벌어지는 익숙하지 않은 일들을 판단하여 서로 반응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은 인간과 동물이라는 이종 간에 벌어지는 가장 미묘하고 섬세한 작업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리고 개는 이 놀라운 작업을 타고난 성품과 훈련에 의해 자연스럽게 해내면서, 동반자의 역할까지 해낸다. 장애인이 안내견과 함께하고 안내견을 돌보면서 자존감을 키우고 우울감이 낮아진다는 연구도 있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과 동물과의 관계가 주는 순기능에 대해서 교육, 심리, 의학 등 여러 분야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물론, 장애인의 불편과 위축을 줄이기 위해 전체적 사회 체계와 문화적으로 정당한 편의가 제공되어야 한다. 그리고 동물이 단순히 치료 도구나 단편적인 위안거리로 제시되어서는 안 된다. 장애인과 동물의 관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존중한다는 것은 인간과 동물 모두를 위해 중요하다.

그래서 장애인이 반려동물과 함께 생활하는 데 어떤 지원이 필요한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장애인과 함께하는 동물들 중에는 장애인의 활동을 보조하기 위해 특수하게 훈련을 받는 동물들도 있다. 이들에 대한 배려는 어떻게 해야 할까?

시각장애인 안내견의 역사

인간과 동물의 모든 만남이 그러하듯 시각장애인이 개의 도움을 받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인지 명확하지는 않다. 일부 연구자들은 로마 폼페이 유적에서 나온 모자이크화에 근거해 당시 이미 개에 목줄을 묶어 시각장애인을 돕게 한 경우가 있었다고 설명한다. 중세 유럽의 예술 작품, 중국의 풍속화에도 개에 목줄을 묶고 지팡이를 든 채 이동하고 있는 시각장애인의 모습처럼 보이는 장면이 있다. 안내견은 문화권을 막론하고 종종 보조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19세기 초부터 시각장애인을 위해 안내견을 양성하는 노력이 시작되기는 했지만,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양성은 1916년 독일 올덴부르크에서 시작됐다. 이른바 '시각장애인 인도견 학교'였는데, 여기서는 1차 세계대전 때 시각을 잃은 참전군인들을 돕도록 셰퍼드를 훈련시켜 분양했다. 이후 안내견 양성 기관이 더 생겨나면서 참전군인이 아닌 시각장애인에게도 분양되기 시작했고, 약 10년 후에는 4,000여마리의 안내견이 활용됐다 한다. 중세 그림에 묘사된 것보다는 좀 더 큰 리트리버와 셰퍼드 종이 안내견으로 많이 활용됐다.



시각장애인 안내견의 업무 환경

안내견으로 선발된 강아지들은 위탁가정에서 사회화 훈련을 거쳐야 한다. '퍼피 워킹'이라고 하는 이 훈련 과정 동안 강아지들은 인간 세계가 주는 많은 자극들에 익숙해지게 된다. 사실, 도시는 동물들에게는 너무나도 많은 자극과 위험으로 가득차 있다. 인공적인 냄새, 사람들마저도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다양한 소리들.

인간과 비교할 수 없는 민감한 후각 그리고 청각을 가진 존재에게 이런 조건은 얼마나 혼란스러울까? 그래도 개들은 꽤나 잘 적응해 인간과 함께 헤치고 다닌다. 뉴욕 9·11테러 당시 시각장애인인 마이클 힝슨을 78층에서 지상까지 무사히 내려오게 했던 안내견 로젤(Roselle) 이야기는 극단적 환경에서도 이들이 얼마나 충실하게 제 역할을 하는지 보여주는 뭉클한 예이다.

'훈련 중' 또는 '교육 중'이라는 문구가 적힌 주황색 조끼를 입은 개가 길을 가고 있다면 퍼피워킹 중이라 생각하면 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활동 중인 안내견 수는 80마리 정도라 자주 만나기는 어려울 듯하다. 나도 식당에서 노란색 조끼를 입은 안내견을 본 적이 없다. 고작해야 지하철이나 쇼핑몰에서 한두 번 마주쳤을 뿐이다.

그러니 안내견이 다른 사람들에게 일상적인 불편을 줄 가능성은 크지 않다. 장애인복지법은 시각장애인 안내견에게 '장애인 보조견'이라는 법적 지위를 줘서, 모든 시설과 장소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장애인차별금지법에서도 보조견 사용을 방해하거나 제한, 배제, 거부하는 행위는 손해배상 대상이다. 사회적 비난도 동시에 받는다. 그런데도 국가 예산을 들여 '시각장애인 안내견도 식당이나 교통수단에서 장애인과 함께할 수 있다'라는 캠페인을 따로 해야 할 만큼 이들에 대한 배려가 적다.

그렇다면 안내견 입장에서는 무엇이 보장되고 있을까? 장애인 지원 관련 통계에서 시각장애인 안내견은 '장애인 보조기기'로 구분되어 있다. 동물보호법에서도 일반적인 동물보호의 원칙이 적용되기는 하지만 장애인 보조견을 위한 규정은 이들을 실험동물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뿐이다(제24조 동물실험금지). 이들의 업무상 복지 보장에 대한 언급은 없다.

장애인 안내견의 업무를 방해하거나 해를 가할 경우 장애인에 대한 피해로 간주할 수는 있지만, 동물의 입장에서 보호할 근거는 없다. 훈련을 담당하는 기관이 마련한 안내견의 일과 휴식에 대한 지침과 기준은 당연히 있겠으나, 이를 지원하는 체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편적인 예로, 장애인 안내견이 장애인과 함께 편하게 앉을 수 있거나 쉬거나 물을 마실 수 있는 장소가 마련된 시설이 있던가. 어떤 교통수단에 장애인과 안내견이 함께 앉을 수 있는 공간이 따로 마련됐던가. 안내견은 늘 어느 구석에 웅크리고 몸을 감춰야 하는 것은 아닌가.


이제는 많이 알려져서 다들 조심하고 있지만, 여전히 안내견을 만지거나 이름을 부르거나 사진을 찍어 업무를 방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필요한 배려와 적절한 거리두기는 아주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얼마 전 시각장애인 안내견으로 훈련 중이던 강아지가 한 대형마트에서 겪은 고초가 크게 보도되었다. 겁을 먹은 강아지의 사진은 우리를 분노하게 했다. 실제 장애인과 함께 안내견이 이런 상황에 놓인다 생각하니 아찔하다. 동물이 어려움을 겪는 곳에 인간의 어려움이 함께 있다는 것을 새삼 인식하게 된다.

시각장애인 안내견이 더 많아지면 어떨까?

우리나라에서 심한 정도의 시각장애를 가진 사람은 2019년 말 기준 3만7,000여명에 이른다. 2017년 조사에 따르면 이 중 시각장애인 안내견의 도움을 받고 싶은 사람은 약 10% 수준인 3,400여명에 달하지만 실제 도움을 받고 있는 사람은 매우 적다. 현재 두 개의 기관이 장애인 보조견을 훈련, 해마다 약 20마리 정도 분양한다. 훈련하는 데 얼마나 많은 노력과 비용과 시간이 투여되는지 생각해보면 이 기특한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안내견과 훈련자들에게 많은 격려와 지원이 필요하다.

당장 그렇게 되긴 어렵겠지만 안내견이 필요한 모든 시각장애인에게 훈련된 개가 분양된다면, 전국적으로 약 3,000마리의 안내견이 우리 생활 반경에 들어온다. 그렇다면 조금 더 빈번하게 식당이나 지하철 등에서 안내견과 마주칠 수 있을 것이다. 슬슬 안내견의 업무 환경을 개선시켜줄, 그럴 준비를 좀 해보면 어떨까.

천명선 서울대 수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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