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을 증명하고 수치를 견뎌야 가까스로, 복지에 가 닿는다

입력
2020.12.17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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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배동 모자 비극'으로 복지체계 도마에
형편 아닌 '신청자 의지' 따라 혜택 차이
까다로운 기초수급자 신청 개선 목소리

"자녀 양육비 받는 거 있으세요? 부모 형제나 도와주시는 분 없으세요?"

기자가 기초생활보장수급 신청자라고 소개하고 서울의 한 주민센터를 찾자, 창구에 앉은 담당 직원은 연이어 질문을 퍼부었다. "도와줄 사람 정말 없나요? 자녀는 몇 살이에요? 집은 전세인가요, 월세인가요? 법적으로 이혼은 했나요?"

담당 직원은 다른 민원인과 직원들이 다 들을 수 있는 공개된 공간에서, 숨기고 싶은 사생활까지 모두 털어놓으라고 했다.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서 발달장애 아들과 함께 살다가 쓸쓸히 생을 마감한 김모(60)씨는 평소 복지 수혜 사실을 숨기며 "수치스럽다"고 말했다. 그 부끄러움이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지, 주민센터를 직접 찾은 다음에야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기초수급자 되기는 고난도 작업

어머니가 숨진 지 5개월 만에 발견되고, 발달장애 아들은 노숙을 해야 했던 '방배동 모자의 비극'이 본보 보도를 통해 알려지자, 갖은 수고와 부끄러움을 감수해야만 비로소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대한민국의 '복불복 복지'에 대한 비판이 잇따르고 있다.

김씨처럼 인터넷 활용이 익숙지 않거나 불가능한 경우, 기초수급자 신청을 위해 가장 먼저 찾아야 할 곳은 읍·면·동 주민센터다. 복지 담당자를 창구에서 마주하면 제출 서류를 설명받는 등 기본 상담 절차를 거친다. 별도 상담실을 이용할 수도 있지만, 공간적 제약으로 상담실이 없는 경우도 있다. 먼저 민원인에게 상담실 존재를 알리는 지침이 없는 것도 수급 신청자들이 말하는 고충이다.

신청 과정은 더 힘들다. 신청자 본인이 준비해야 하는 서류만 신청서, 금융정보 제공 동의서, 통장사본 등 12종류나 된다. 자신의 구체적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선 은행이나 과거 직장 등을 찾아가 떼야 하는 서류도 많다. 근로 능력이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병원에서 최소 두세 달가량 치료받은 진료기록부와 진단서까지 마련해야 한다. 생계(중위소득 30%)·의료(중위소득 40%) 급여를 받으려면 부양의무자의 동의서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혼한 배우자가 부양의무자라면 여기서 수급 신청이 막히는 경우도 허다하다.

생전 김씨 역시 이 모든 과정이 불편했다. 서초구청 측은 "평소 (김씨가) 복지 수급을 ‘수치스럽다’고 표현하며 복지 혜택을 숨기고 싶어했다"고 설명했다. 도와줄 친족이나 지인, 사회복지사가 대신 수급 신청을 할 수 있지만, 김씨에겐 조력자가 없었다. 2020년 2인 가구 기준 생계급여(최대 월 89만 7,594원)가 있었다면, 소득이 거의 없던 김씨 모자에게 적지 않은 도움이 됐겠지만 까다로운 신청 과정이 이를 가로막았다.

돈 받으려면 감수해야 하는 수고일까?

한국의 복지는 '얼마나 형편이 어려운지'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 '얼마나 혜택을 타낼 의지가 있는지'에 좌우된다. 전문가들은 개인이 적극 신청해야만 혜택을 주는 '신청주의 복지'를 넘어 '적극적 복지'가 필요하다고 제언한다. 구인회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취약층과 빈곤층에 대한 지원이 과도하게 엄격한 기준으로 심사되는 경향이 있다"며 "절차를 간단하고 쉽게 만드는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송파구 세 모녀(2014년), 관악구 탈북 모자(2019년), 방배동 모자(2020년) 비극 등 유사 사례가 반복되자 정부에서도 절차를 간편하게 만드는 일에 주력하겠다고 밝혔다. 보건복지부는 "내년에 시행될 제2차 기초생활보장 종합계획에 따라 서류뿐 아니라 절차 간소화를 위해 노력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행정안전부 역시 "별도 공간에서 상담을 받고 싶어 하는 민원인을 위해, 주민센터 상담실의 존재를 민원인에게 알리는 절차를 추가하겠다"고 밝혔다.

오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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