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화폐가 다시 살아났다. 세상이 코로나에 신음하는 사이, 대표적 암호화폐 비트코인 가격은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한편에선 암호화폐의 부활을 얘기하지만, 2017년의 그늘이 워낙 커 불안한 것도 사실이다. 과연 암호화폐는 다시 살아난 걸까, 아니면 또 한번의 버블의 길을 가는 걸까.
“비트코인 다시 2,000만원 넘었다.”
30대 직장인 A는 친구 B에게서 온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뭔가 뒤통수를 맞는 듯한 느낌이랄까. 잊고 있었던 기억이 다시 살아났다.
3년 전 가을. 게임사에 다니던 B의 “비트코인은 21세기 금”이라는 말에 그는 비트코인을 샀다. “그해 11월 중순 비트코인 1개에 700만원 할 때 첫 투자를 했죠. 두 주 만에 1,000만원을 넘기더니 12월 들어 2,000만원을 뚫더라구요. 주식 투자도 해 봤는데, 암호화폐는 정말 신세계였어요.”
당시 테헤란로는 암호화폐 광풍이었다. 블록체인 기술은 금방이라도 인터넷처럼 대중화될 것 같았고, ‘토큰’ ‘코인’이라는 이름만 달고 있으면 수십~수백 배 가격이 뛰었다. 국내 암호화폐거래소가 전 세계 거래량 1위를 차지하는가 하면, 해외에서는 암호화폐공개(ICO)로 몇 시간 만에 수 천 억원을 끌어 모은 블록체인 스타트업도 등장했다.
거품 우려가 쏟아졌다. 그리고 2018년 1월11일 박상기 법무장관은 “암호화폐 거래금지, 거래소 폐쇄법을 준비 중”이라는 폭탄 발표를 했다. 암호화폐 시장은 초죽음이 됐다. 블록체인 업계, 암호화폐 시장에선 지금도 ‘박상기의 난’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 암호화폐 거래소에서 비트코인 매물이 쏟아졌다. 블록체인 기술 기업들이 발행한 코인 가격도 수직 하락을 거듭했다. 비트코인은 2019년 3월 400만원대로 내려갔다. 쓴맛을 본 A는 이후 비트코인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비트코인은 '최악의 버블', '기술로 포장한 사기', '컴퓨터 천재들의 장난'이라는 비난을 받으며 사망한 것처럼 보였다. 암호화폐를 화제로 올리면 “아직도 꿈에서 깨지 못했냐”는 핀잔이 날아왔다. 기술로서의 블록체인과 투자대상으로서의 암호화폐를 구분하고, “기술은 발전시키지만 투기적 매매는 억제한다”는 정부 정책도 바뀐 것이 없다.
그런데 가격이 다시 뛰고 있다. 일부 암호화폐 거래소에서는 2018년 1월의 역대 최고가 기록도 갈아치웠다. 원화로 2,000만원을 넘기더니, 지금은 달러 기준 2만달러에 육박하고 있다.
3년 전 비트코인 1차 랠리 때 투자자들은 기술이 충분히 성숙하지 않았고, 상용화되지 않았어도 블록체인 그 자체에 열광했다. 그러나 계속된 상용화 실패, 잇따르는 코인 사기와 해킹사고, 당국의 고강도 규제 등으로 일순간 물거품이 됐다. 스포트라이트가 꺼지고 관객들도 다 떠난 빈 무대에서 누구도 새로운 쇼를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일론 머스크의 테슬라를 생각해보자. 2018년9월 월가는 머스크를 테슬라에서 쫓아내야 한다며 공공연히 비난했다. 그의 아이디어에 열광했던 투자자들이 대량 상용화가 늦어지자 화살을 퍼부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누구도 자율주행 전기차를 꿈이나 가능성이라고 하지 않는다.
2019년 6월 페이스북이 글로벌 암호화폐, 리브라(Libra)를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최강 IT기업이 암호화폐를 만든다고 하자, 블록체인 기술은 다시 주목받았다. 특히 정책 당국자들이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도입을 앞당겨야 한다는 자극을 받았다. 자칫 민간 기업에게 디지털 통화 주도권을 뺏길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고조됐다.
코로나19도 암호화폐 시장에는 호재였다. 각국이 팬데믹 대응을 위해 대규모로 돈을 풀기 시작하자, 자산가격은 뜀박질했다. 금, 주식, 부동산, 원자재 등 오르지 않는 자산이 없었다. 비트코인도 당연히 움직였다. 비트코인 탄생배경이었던 ‘금융위기, 무제한 유동성살포’ 당시와 거의 같은 궤적이었다.
특히 주목되는 건 각국 정부, 기관투자자, 대형 금융기관(은행)이 디지털 화폐에 대해 3년 전과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단적으로 우리 정부의 긴급재난지원자금을 보자. 이제는 재난지원금을 지역화폐, 지역상품권으로 집행하자는 주장이 낯설지 않다. 블록체인 기술 중 '스마트 콘트랙트'란 기술을 이용하면 디지털 재난지원금을 마포구에 있는 연매출 3억원 미만 소형 식당에서만 쓸 수 있게 만들 수 있다. 돈이 디지털화하면 이런 프로그램이 가능하기 때문에 각국 중앙은행이 CBDC에 주목하는 것이다. 실제로 중국 인민은행은 지난 10월 선전시에서 5만명을 대상으로 디지털 위안화 실전 테스트까지 했다.
암호화폐 시장에 기관투자자들이 본격 등장한 것도 커다란 변화다. 미국의 암호화폐 투자펀드 운용사 그레이스케일은 기관 자금만 100억달러 이상을 받아 운영 중이다. 기업용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나스닥 상장사 마이크로스트래티지는 지난 8월 회삿돈으로 비트코인에 직접 투자했고 이달에는 6억5,000만달러어치 전환사채를 발행했다. 빚을 내서 비트코인을 사겠다는 것이다. 마이클 세일러 대표는 “현금을 보유하는 것보다 비트코인을 가지고 있는 것이 장기적으로 더 낫다”고 말했다.
대형 금융회사들도 분주해졌다. 동남아 최대은행 중 하나인 싱가포르 DBS는 지난 10일 디지털 자산 거래소를 직접 운영한다고 발표했다. 기관이나, 거액 개인고객을 위해 비트코인 보관업무를 하는 은행은 많지만, 직접 암호화폐 거래소를 하겠다는 은행은 DBS가 최초다. DBS는 주식, 채권, 펀드를 ‘디지털 토큰’으로 만들어 팔겠다는 전략도 제시했다. 예를 들어 기관들이 펀드를 만들어 매입한 대형빌딩이 있다. 중도에 기관 중 하나가 급하게 돈 쓸 일이 생겼는데, 그렇다고 당장 빌딩을 팔 수는 없다. 이때 펀드 자체를 디지털 펀드로 바꿔서 부분 매각하면 빌딩 전체를 팔지 않고도 자금을 내줄 수 있다. DBS는 전통적 투자자산을 디지털 토큰화해 파는 새로운 디지털 금융사업을 하겠다는 것이다.
암호화폐 낙관론자들은 비트코인이 10만달러, 100만달러까지 상승할 것이라는 대담한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금처럼 채굴량이 정해져 있고, 갈수록 희소성이 높아질 것이라는 논리다.
투자 대상으로서 비트코인을 “지금이라도 사야 하나”라는 질문에 쉽게 답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분명한 것은 암호화폐가 진짜 돈의 기능을 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2,600만개의 글로벌 가맹점을 보유한 세계적 전자결제기업 페이팔은 지난 10월 비트코인 등 암호화폐를 매매하고, 결제에 활용할 수 있게 하겠다고 밝혔다. “비트코인은 사기”라고 외쳤던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도 최근 인터뷰에서 “부분적으로는 가치저장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말을 바꿨다.
비트코인이 뿌린 디지털 금융은 이제 막 파종을 끝냈다. 정부, 기관, 은행 등은 기술로서의 디지털화가 아닌, 금융의 개념 자체가 디지털로 전환하는 것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스마트 콘트랙트를 이용하면 돈을 예금하고, 대출받는 일상적 금융거래에 은행이라는 중간자가 필요치 않다. 디파이(DeFi·Decentralized Finance)라고 하는 탈중앙금융 서비스 프로그램(프로토콜)을 활용하면 누구한테 돈을 맡기고 누구한테 돈을 빌려줄 것인지 미리 짠 프로그램 안에 넣어 두고, 그 규약(프로토콜)대로 암호화폐를 예치하고 대출하게 된다. 아직은 실험적인 수준이지만 디파이는 기존의 금융 판도를 완전히 바꿀 핵폭탄이다.
암호화폐는 2017년 큰 시련을 겪었다. 그러나 긴 침체의 터널을 거치면서도 조금씩 기술발전을 이뤄 냈고 저변도 넓혀 왔다. 이번 랠리가 3년 전과 다른 이유다.
최창환 블록미디어 대표
서울경제신문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하고, 2000년 인터넷신문 이데일리를 창업해 대표를 역임했다. 2018년 블록체인이 제2의 인터넷혁명을 이룰 것이란 확신으로 블록체인 전문매체 '블록미디어'를 창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