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에 20년 가까운 유대관계마저 깨지는 걸까.
유명 감독 크리스토퍼 놀런이 할리우드 거대 스튜디오 워너브러더스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결별 가능성까지 제기되고 있다. 놀런 감독은 영화 ‘인썸니아’(2002) 이후 워너브러더스와 협업 관계를 유지해왔다.
갈등의 불씨는 워너브러더스의 지난 3일 발표였다. 워너브러더스는 ‘매트릭스4’와 ‘수어사이드 스쿼드2’ 등 내년 자사 영화 17편 모두를 극장과 동영상스트리밍서비스(OTT) HBO맥스에서 동시 공개한다고 밝혔다. 극장 우선 상영이라는, 100년 가량 지속되어 온 관행을 뒤흔드는 발표였다. 앞서 워너브러더스는 이달 개봉하는 블록버스터 ‘원더우먼 1984’를 극장과 HBO맥스에서 동시 공개한다고 지난달 발표하기도 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LA)와 뉴욕 등 주요 도시의 극장들이 코로나19 확산으로 문을 닫은 상태에서 관객을 모으기 힘들다는 판단이 작용한 결정이었다.
워너브러더스의 자매사 HBO맥스를 살리기 위한 방편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OTT 선두 그룹인 넷플릭스(1억9,500만명)와 디즈니플러스(8,680만명)가 코로나19를 발판 삼아 유료 가입자 수를 크게 늘린 반면 지난 5월 출범한 HBO맥스(860만명)는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넷플릭스는 ‘퀸스 갬빗’과 ‘더 크라운4’ 등 히트 오리지널 시리즈를 꾸준히 선보이고 있고, 디즈니플러스는 ‘만달로리안’ 시리즈 같은 신상품으로 가입자를 매혹시키고 있는데, HBO맥스는 이렇다 할 새 킬러 콘텐츠가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놀런 감독은 워너브러더스의 조치에 분개했다. 그는 워너브러더스의 발표가 나오자마자 “우리의 거물 감독과 매우 중요한 배우들이 밤에 잠들기 전엔 위대한 스튜디오와 일한다고 생각했다가 일어나보니 최악의 OTT와 일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는 “이것은 매우 매우 매우 매우 엉망진창”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놀런 감독은 ‘극장 근본주의자’로 유명하다. 영화는 반드시 큰 스크린으로 봐야 한다는 신념이 강하다. 디지털 제작과 상영이 표준으로 자리잡은 상황에서도 여전히 70㎜ 필름으로 촬영한다. 놀런 감독은 대형 스크린의 대명사인 아이맥스 상영을 염두에 두고 영화를 만들어 오기도 했다.
놀런 감독은 코로나19로 ‘블랙 위도우’와 ‘007 노 타임 투 다이’ 등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이 개봉 시기를 무기 연기한 것과 달리 지난 9월 ‘테넷’의 개봉을 강행했다. 코로나19로 고통 받는 극장을 구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테넷’은 북미 시장에서 5,740만달러를 벌어들이는데 그쳤다. 놀런 감독의 전작 ‘덩케르크’(2017)가 북미에서만 1억9,000만달러의 흥행 수익을 올린 점과 크게 비교된다.
내년 워너브러더스 영화 중엔 놀런 감독 작품이 포함돼 있지 않다. 자신과 직접적으로는 무관해 보이는 일에 놀런 감독이 예민하게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배신감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 연예전문 매체 버라이어티는 “놀런 감독 측근에 따르면 그는 언론 보도를 통해 워너브러더스의 결정을 알게 돼 배신감을 느꼈고, 17편의 감독들조차 (보도 전) 결정 사실을 몰랐다는 데 경악했다”고 5일 보도했다. 놀런 감독은 ‘원더우먼 1984’의 HBO맥스 동시 공개는 워너브러더스를 통해 사전에 알고 있었다고 한다.
놀런 감독과 워너브러더스는 그동안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워너브러더스는 30대 중반 신예 감독이었던 놀런을 과감히 기용해 ‘배트맨’ 3부작(배트맨 비긴즈, 다크나이트, 다크나이트 라이즈)을 맡겼다. 놀런 감독은 용도 폐기 직전까지 갔던 ‘배트맨’ 시리즈를 부활시키며 워너브러더스의 기대에 화답했다. 놀런 감독의 ‘배트맨’ 3부작은 전 세계적으로 20억달러를 벌어들였다.
워너브러더스는 이후 ‘인셉션’(2010)과 ‘덩케르크’(2017) 등 놀런 감독의 블록버스터 영화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고, 놀런 감독은 흥행으로 보답했다. 놀런 감독은 돈으로 맺어진 관계를 넘어선 의리를 워너브러더스에 보여주기도 했다. 파라마운트 자본으로 ‘인터스텔라’(2014)를 연출할 때 계약 조건 중 하나로 워너브러더스를 어떤 식으로든 관여시킨다는 내용을 포함시켰다. ‘인터스텔라’는 한국 등 일부 국가에선 워너브러더스 배급으로 상영됐다.
워너브러더스는 놀런 감독의 비판에 언급을 자제하며 확전을 경계하고 있다. 할리우드 모든 스튜디오가 눈독을 들이는 인재를 잃지 않기 위해서다. 놀런 감독의 차기작은 어떤 영화가 될지, 어느 스튜디오와 협업하게 될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버라이어티는 놀런 감독과 워너브러더스의 미래를 짧은 문장으로 예측했다. “공은 놀런 감독에게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