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린 손가락 들고 20개 병원 전전 "코로나 아니면 치료도 못 받나요"

입력
2020.12.08 18:30
10면
노숙자·HIV 감염인 등 민간병원서 처치 거절
코로나 환자 늘며 공공병원서도 밀려난 신세

"손가락이 잘려 병원에 갔어요. 꿰매주기라도 하면 안 되나요? 병상이라도 내줄 수 없나요? 계속 호소했어요. 그런데 안 된다고 했어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세가 커지던 9월 19일. 공장에서 제품을 만들던 박모(43)씨의 엄지손가락이 기계에 말려 들어갔다. 119구급차를 타고 인근 병원 응급실을 찾았지만, 병원은 "처치가 불가능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박씨가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감염인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박씨는 HIV 감염인을 받아주는 공공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공공병원도 "코로나 사태로 감염병을 전담하고 있어 수술이 안 된다"고 거절했다. 그렇게 잘린 손가락 마디를 들고서 20개 병원을 찾았지만 연달아 거절당했다. 박씨는 사고 후 12시간이 지나서야 서울 노원구 한 병원 수술실에 누울 수 있었다. 응급 처치 시간을 놓친 박씨는 결국 평생 손가락을 굽힐 수 없다는 판정을 받았고, 아예 일자리마저 잃었다.

코로나19 확진자 증가로 의료기관의 감염병 처리 업무가 가중되면서, 취약계층에서부터 의료공백 사태가 현실화하고 있다. 특히 HIV 감염인이나 노숙인 등이 의료기관에서 제때 처치를 받지 못하고 있다. 민간병원은 방역을 이유로, 공공 의료기관들은 코로나 전담병원으로 지정돼 이들에게 문을 열지 않고 있는 것이다.

"5년 전 메르스 때와 뭐가 다른가?"

HIV 감염인 윤가브리엘(52)씨 역시 올해 초 발병한 중이염 수술이 10개월 가까이 미뤄졌다. 민간 병원이 윤씨의 중이염 치료를 해주지 않던 상황에서, 서울국립의료원마저 감염병 전담병원이 돼서다. 윤씨는 "코로나19 상황에서 공공 의료원이 막히면 HIV 감염인들은 비싼 병원비와 낙인으로 이중고를 겪는다"고 토로했다.

HIV 감염인들은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라고 말한다. 지난 정부에서 발생한 2015년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사태에서도 HIV 감염인들은 병원 문턱을 밟지 못했다. 당시 서울국립의료원 등 공공병원이 메르스 전담 병원으로 지정되면서 입원 중이던 HIV 환자들이 대거 강제로 퇴원을 당했다. 윤씨는 "그땐 입원뿐만 아니라 외래진료조차 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며 "어떤 HIV 감염인은 외래를 받기 위해 경남 진주시까지 찾아간 적도 있다"고 말했다. 당시 이러한 문제가 논란이 돼 국회와 의료계가 대안을 찾겠다고 했지만, 정부가 바뀐 지금까지도 전혀 달라진 게 없다.


노숙인도 입원한 병원서 무작정 퇴원

노숙인들도 코로나19 국면에서 치료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서울 시내 병원급 이상 의료시설 283곳 중 노숙인이 제대로 치료 받을 수 있는 곳은 단 6곳에 불과한데, 그마저도 코로나19 전담병원으로 바뀌었다. 사실상 마지막 보루였던 서울시립동부병원까지 최근 전담병원으로 전환되면서, 노숙인들이 제대로 된 의료 서비스를 누릴 수 있는 병원은 이제 없다.

30대 중반 노숙인 안모씨는 최근 입원 중이던 동부병원에서 쫓겨나다시피 나왔다. 서울시가 동부병원을 코로나19 전담병원으로 지정하기 위해 중환자가 아닌 환자들을 퇴원시켰기 때문이다. 인공 고관절 수술을 마치고 재활을 받던 안씨는 "옮겨 갈 수 있는 병원이 없어 무작정 퇴원하게 됐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코로나19 사태로 지자체가 운영하는 응급대피소 등이 축소 운영되면서 지병이 있는 노숙자들은 몸을 뉠 곳마저 찾지 못하고 있다. 노숙인과 쪽방 생활자 등을 돕는 단체 '한사랑가족공동체'의 김주미 실장은 "그나마 노숙인 등이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공공의료기관을 별다른 대책도 마련하지 않고 모두 코로나19 전담병원으로 돌리면 목숨이 위중한 노숙인은 어떻게 해야하는 것이냐"고 지적했다. 이동현 홈리스행동 상임활동가도 "서울시가 지정한 노숙인 진료시설이 공공병원 중심으로 돼 있는 탓에 감염병 유행 때마다 진료 공백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며 "민간의료기관까지 노숙인 등 소수자들에 대한 진료를 확대해야 한다"고 제도 개선을 촉구했다.

이정원 기자
우태경 기자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