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 백신 접종 개시... 빠른 속도전 배경은 브렉시트?

입력
2020.12.08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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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데이’ 명명하며 “결정적 전환점” 자신감
내년 EU와의 결별에 따른 혼란 대비하고
기민 대응 성과 거두면 독립 정당화 가능

“내 임무이자 큰 영광이다.”

8일(현지시간) 오전 83세인 부인과 함께 영국 뉴캐슬의 로열 빅토리아 병원에서 미국 제약사 화이자와 독일 생명공학기업 바이오엔테크가 공동 개발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주사를 맞은 하리 슈클라(87)가 전날인 7일 일간 가디언 등 자국 언론에 피력한 소감이다.

지금 세계의 이목이 영국에 쏠려 있다. 코로나19와의 전쟁에서 인류의 첨병을 자임했기 때문이다. 2일 맨 먼저 ‘화이자 백신’의 긴급 사용을 승인한 이 나라는 1주일도 되기 전에 40만명을 대상으로 백신 접종을 시작했다. 잉글랜드 지역의 50개 거점 병원이 지정됐고, 이곳들 중심으로 80세 이상 고령자, 요양원 직원, 현장 의료 인력이 우선 주사를 맞는다. 이날 코번트리 대학 병원에서 세계 최초로 화이자 백신 예방 접종을 한 90세 할머니 마거릿 키넌은 “한 해 대부분을 혼자 보냈는데 새해에는 가족ㆍ친구들과 지낼 수 있게 됐다”며 감격했다.

슈클라는 영국 정부를 대변한다. 보수 성향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가 전한 고위 관리들의 언급에는 세계를 이끄는 ‘위대한 영국’의 상(像)이 반영돼 있다. 영국 국민보건서비스(NHS) 최고 책임자 사이먼 스티븐스는 “이 백신의 배치는 팬데믹(감염병의 세계적 대유행)과의 전쟁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 될 것”이라며 “NHS 직원들은 세계 첫 백신 접종으로 영국이 보건 서비스를 선도했다는 사실에 자랑스러워하고 있다”고 말했다.

맷 행콕 보건장관이 “앞으로 1주일이 역사적인 순간이 될 것”이라며 짐짓 자신감을 과시하고 백신 접종 시작일을 ‘V-데이’로 명명한 건 초조함의 방증이다. 제2차 대전 당시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가 애국심을 호소하며 ‘승리의 V’ 표시를 한 일을 떠올리게 한다고 AP 통신은 평가했다.

그러나 영국을 보는 상당수의 시각은 회의적이다. 미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서툴렀던 영국의 코로나19 위기 대응 이력을 감안할 때 성공은 보장된 게 아니라고 보도했다. “초기 유행 당시 마스크와 장갑 등 기본적 보호 장비의 만성적 부족 상태를 방치해 의료진을 감염 위험에 빠뜨리고 이후 160억달러를 쏟아 붓고도 제대로 된 검사ㆍ추적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애를 먹은 정부가 불과 몇 달 만에 수천만명을 대상으로 한 백신 접종에 성공하겠냐”는 것이다. △백신 절도ㆍ강도 △초저온 보관 장비 파괴 △백신 정보를 노린 사이버 공격 등이 신문이 거론한 위협들이다.

일부에선 내년 1월 유럽연합(EU)과의 결별(브렉시트)을 코앞에 둔 사정이 영국의 이런 돌출적 속도전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란 분석을 내놓는다. ‘마이 웨이’가 또 다른 ‘마이 웨이’를 부른 셈이다. 일단 대비 차원이다. 현재 진행 중인 EU와의 무역 협정 등 관세 관련 협상이 연내 타결되든 안 되든 백신 운송에는 차질이 없을 것이란 게 정부의 장담이지만, 국경에서 혼란이 발생하기 전에 최대한 백신을 공급 받아놓는 게 낫겠다고 판단해 백신 상용화를 서둘렀을 것이란 얘기다.

다른 요인은 브렉시트를 정당화하고 싶은 보수당 정권의 정치적 의도다. 애초 브렉시트의 명분 중 하나가 EU로부터의 독립을 통한 세계 일류 국가 복귀였던 만큼 기민한 백신 상용화가 성과를 거둔다면 브렉시트 덕이었다는 선전이 가능해진다. 실제 민첩한 영국이 발빠르게 움직이는 동안 유럽은 관료주의 타성으로 방역과 경제적 측면에서 비싼 대가를 치르리라는 게 영국의 백신 긴급 승인 당시 텔레그래프의 논평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배짱이 좋아도 유럽과 완전히 남남이 되는 ‘노딜’ 브렉시트는 부담이다. 외신에 따르면 △공정 경쟁 여건 △분쟁 발생 시 해결 거버넌스 △어업 등 3가지 쟁점을 놓고 막판 진통 중인 브렉시트 협상의 돌파구를 찾기 위해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곧 브뤼셀로 건너가 EU 행정부 수반 격인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을 만난다. 지도자들의 개입은 협상 진전을 가리키는 신호라는 게 블룸버그 통신의 해석이다.

권경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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