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톨이 직장생활, 폭력 일삼던 전 남친... "과거 알려질까 두려워"

입력
2020.12.07 04:30
24면

편집자주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저를 문제 있는 사람으로 볼까 봐 두렵고 불안해요. 23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1남2녀 중 장녀였던 저는 죽기살기로 공부해 꿈꾸던 직장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직장에서 제대로 적응을 못했어요. 6년간 단 한 명과 대화다운 대화를 못 해봤습니다. 공부만 하다 들어가서인지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몰랐어요. 무기계약직 선임에게 제가 다짜고짜 명령조로 말해서 갈등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 선임은 굉장히 능력 있는 사람이었어요. 첫 단추를 잘못 꿴 뒤부터는 실수와 서투름의 연속이었죠. 일하다 실수가 발견되면 사람들은 미우니까 더 면박을 줬고, 그러면 저는 기가 죽어서 아무 말도 못하다가도 평상시엔 말이 함부로 터져 나왔어요.

그러던 중 남자친구가 생겼어요. 당시 직장 때문에 자취하던 중이었는데 밤길을 혼자 가던 제게 말을 걸어왔어요. 충동적으로 뭐에 홀린 듯 만났어요. 만난 지 3일 만에 사귀고, 동거를 했습니다. 애정은 있었지만 많이 싸웠고, 그럴 때마다 그 남자는 저를 때렸어요. 한번은 음료수를 잘못 사왔다고 목을 졸랐고, 새벽에 뺨을 맞고 쫓겨난 적도 있어요. 어리석은 일인 줄 알았지만 그땐 그 사람이 떠나면 혼자 남겨질 것이 두려워 끝까지 매달렸습니다. 직장생활도 엉망인데 남자관계까지 소문이 나면 살 수 없을 것 같았어요. 3년간 폭행에 시달리다 친구가 도와줘 경찰을 불렀고 그렇게 관계가 끝났어요. 그 뒤 그 지역을 도망치듯이 벗어나 다른 곳으로 직장을 옮겼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있는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저는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어요.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지만 늘 다정했고 저를 아껴주셨습니다. 어머니와는 잘 안 맞았어요. 어머니는 싸우다 방 안에 들어가던 저를 보고 화가 나서 베란다 창문으로 넘어온 적도 있어요. 돌아가신 외할머니까지 부르시며 울부짖으신 적도 있어요. 그렇지만 대체로 좋으셨고, 동생들과도 잘 지냈어요. 학창시절에도 저는 친구가 많진 않았어요. 대부분의 친구들이 저를 답답해했죠. 저와 가장 오래 알고 지낸 친구는 저를 ‘답답하고 안 좋은 면은 있지만 자기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애’라고 생각한 것 같아요.

새로 옮긴 직장에서는 큰 갈등 없이 지내고 있어요. 다들 제 과거를 모릅니다. 제 사정을 보듬어준 엄마와도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갑자기 불안해지고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게 두렵습니다. 다른 사람한테 제가 맞아도 되는 사람, 맞아도 싼 사람으로 비칠 것만 같아 무서워요. 모르는 남자가 와서 나는 맞아도 싸다고 하면서 때릴 것 같아 두려워요. 과거의 불행했던 일들이 나한테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저를 괴롭힙니다.

박재희(가명ㆍ31ㆍ회사원)



재희씨,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지요. 어찌 살다 보면 후회되는 일들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과거에 겪었던 일로 인해 공포와 두려움까지 느끼는 재희씨의 삶이 비에 젖어 떨고 있는 작은 새처럼 느껴져서 안타깝고 가엽네요. 제가 느끼기에 재희씨는 어떤 일을 결정하거나 진로를 고민할 때는 큰 문제가 없는데, 대인관계에서는 유독 어려움이 큰 것 같아요. 저는 사연을 읽고 당신이 장고(오랜 고민) 끝에 악수(나쁜 방법)를 두고, 악수 둔 것 때문에 일이 꼬이고 다 망가지고, 오해를 사고, 그 뒤부터는 늪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며 괴로워하는 것 같아 보였어요. 왜 그럴까요.

당신은 대인관계에서 주어진 상황이나 갈등을 잘 풀어가기 위해 필요한 정보나 상대의 말과 표정으로부터 포착해야 하는 단서를 재빠르게 알아채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눈치가 없어 보이기도 할 거에요. 반대로 일이 꼬이고 난 후에는 사람들의 반응이나 평가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고 주눅이 들면서, 대인관계에서 좀 간과해도 되는 것에는 지나치게 예민해지는 것 같아요. 필요한 것은 놓치고 불필요한 것에 예민한 거지요. 일상에서 이 예민함이 차곡차곡 쌓이고, 이걸 애써 참다가 어느 순간 도저히 재희씨가 감당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사소한 일에도 충동적으로 폭발해 일을 그르치고 말아요. 그리고 일이 터지고 나면 다른 사람들의 반응에 위축되고, 전전긍긍하고, 자책하고, 소심해집니다.

첫 직장에서도 그랬을 것 같아요. 회사에 가서 의욕적으로 일도 하고, 잘해보려고 했을 테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놓치고, 중요하지 않은 것에 신경이 쓰였을 거고 예민해졌을 거예요. 참다가 결국 폭발했을 거고, 관계가 어그러졌을 거예요. 그 일 때문에 다른 일까지 다 뒤집어쓰고, 궁지에 몰리고, 오해를 샀을 거예요. 얼마나 괴롭고 힘들었을까요.

재희씨의 대인관계 방식에서 또 다른 특징은 자존감이 낮다는 거예요.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은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얘기하고, 잘못한 일에 대해서는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이 편안한 편이지요. 반대로 자존감이 낮고 자기에 대한 확신감이 낮으면 이 말을 잘 못합니다. 뭔가 모른다고 하면 약자가 되는 것 같고, 무릎을 꿇는 것 같고, 자존심이 상하고, 그러면 이상하게 고집을 부리게 됩니다. 재희씨도 그런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첫 직장에서도 처음 해보는 일이니 ‘모른다’고 해도 됐을 텐데 그렇게 말하면 왠지 자존심이 상하는 기분이 들었을 거예요. 상대에게 ‘오해해서 미안하다’고 했다면 쉽게 일이 풀렸을지도 모르는데, 재희씨는 그런 것들이 자존심이 상해서 오기를 부렸을 겁니다. 어머니와의 관계에서도 그런 면이 보여요. 예컨대 어머니가 ‘이건 A야’라고 그랬을 때 그게 아니라고 생각이 들면 재희씨는 강하게 고집을 피우고, 충동적으로 폭발하고 방에 들어가버렸을 거예요. 그런 재희씨를 직장에서는 ‘왜 저러지’라며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갔을 거고, 어머니도 재희씨가 별나다고 생각했을 거고요.


재희씨, 이 과정에서 크게 놓치는 부분이 있어요. 갈등상황에서 다른 사람의 반응과 상황은 아주 세부적인 것까지 자세하게 기억하지만, 정작 당신의 감정과 행동은 자세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면이 있는 것 같아요. 당신이 갈등상황 전후로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느꼈는지, 어떤 것이 방아쇠를 당겨서, 왜, 어떻게 폭발했는지 자세하게 기억하지 못해서, 이후에도 똑같은 방식으로 대인관계를 맺고, 자책과 후회를 반복했던 것 같아요. 당신이 대인관계에서 어떻게 말하고, 행동했는지 잘 기억하고 탐색하고 알아차려야 이것을 토대로 수정하고 바꾸면서 새로운 대인관계를 맺을 수 있어요.

그리고 직장동료처럼 사회적 관계에서의 일은 감정적 기분보다 처리해야 할 내용으로 받아들여야 해요. 상대가 ‘이렇게 일을 하면 안 된다’고 하면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고 해야지, ‘왜 나한테 그렇게 얘기해요’라고 하면 관계가 어긋납니다. 재희씨는 직장에서 내용보다 감정으로 대했던 것 같아요. 다른 사람이 지적하면 ‘왜 내 말을 틀렸다고 하고, 나한테만 뭐라고 하지’라면서 감정으로 받아들였을 거예요.

반대로 가족이나 가까운 관계에서는 처리해야 할 내용보다는 감정적 기분을 중심으로 받아들여야 해요. 가령 가족 간에 오해가 생겨서 가족이 힘들다고 하면 ‘그게 힘들 일이야’라고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네가 힘들다면 내가 미안해’ ‘그런 의도는 아니었는데, 엄마가 나 때문에 속상하다면 제가 죄송하네요’라고 감정으로 받아들이고 감정으로 소통해야 합니다.

당신이 사회성이 다소 부족하다고 다른 사람이 당신을 함부로 대해도 되는 건 절대로 아니에요. 동거한 남자와의 관계가 그렇습니다. 그 남자의 폭행 때문에 당신이 ‘내가 맞을 만한 짓을 했나’ ‘내가 그렇게 하찮은 존재인가’라는 고민을 한다는 게 제 마음을 굉장히 아프게 합니다.

재희씨, 이 세상에 어떤 누구도 맞을 만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걸 분명하게 알아야 해요. 아무리 누군가 감정을 건드리고, 화나게 해도 상대를 때려선 안됩니다. 당신을 때린 그 남자가 잘못된 거지, 당신이 맞을 만한 짓을 했거나, 때려도 좋을 하찮은 존재는 절대로 아닙니다. 당신은 겪어선 안 되는 너무 공포스러운 경험을 했어요. 그런 경험을 하면 많은 사람들은 그와 유사한 상황에 처하거나 닮은 사람을 봤을 때 두려워해요. 하지만 재희씨는 그 경험을 불특정 다수에게 적용해 어떤 누구라도 당신을 때릴 수 있다는 공포에 시달리고 있어요. ‘내가 맞을 만한 사람’이어서 아무나 당신을 공격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두려워하죠. 너무나 안타깝고 치료가 필요합니다. 재희씨는 절대로 그런 사람이 아니고, 어떤 누구라도 맞을 만한 사람은 없다는 점을 명심하세요.


당신이 살아온 인생은 너무나 값지고 소중합니다. 의도적으로 남을 괴롭히거나 나쁜 행동을 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누가 뭐래도 당신의 인생이 가치 있고, 열심히 살아온 것을 부정할 수 없어요. 지나간 일은 물이 흘러가듯 흘려 보내고, 단단하게 잘 딛고 살아가길 바라봅니다. 다행히 엄마와 동생들이 당신의 든든한 버팀목이 돼 줄 것 같습니다. 지난 일은 지나간 시간입니다. 그 일에 너무 몰두해 자책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당신 스스로를 돌아보고, 탐색하고, 자세하게 기억하고, 그리고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면 됩니다. 당신을 응원합니다.

정리=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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