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박자박 소읍탐방] <87>김천 부항면
고갯길이 높은 줄 알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죽령, 문경새재, 추풍령은 영남에서 충청을 잇는 대표적인 고갯길이다. 그 중에서 김천과 영동 사이 추풍령은 해발 221m에 불과하다. 태백산맥에서 소백산맥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줄기에서 가장 낮은 축에 속한다. 추풍령부터 남쪽으로는 다시 1,000m급 산줄기가 뻗어 내린다. 김천시 서쪽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데 그 높이와 규모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폭포와 기암괴석으로 경치가 빼어난 것도 아니요, 유서 깊은 사찰이나 절터가 남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경북 김천, 충북 영동, 전북 무주의 경계인 삼도봉은 그래서 흔히들 ‘무욕의 산’이라 부른다. 나 잘났다고 자랑하지 않고 묵묵히 의연하게 그 자리를 지키는 산이다.
삼도봉(1,176m)으로 오르는 길은 어느 쪽에서든 만만치 않다. 김천 부항면에서 연결되는 등산로가 그나마 짧은 편이다. 산자락 끝 마을인 해인리에서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끝까지 차를 몰면 해발 800m부근까지 올라간다. 이곳부터 삼도봉 정상까지는 1.2km, 넉넉잡아 1시간이다. 나름 잔머리를 쓴 선택이었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결코 쉽지 않다.
지난달 20일,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린 후 간간이 해가 비치는 날씨였지만 삼도봉은 짙은 구름에 덮여 있었다. 정상 아래 주차장은 차량 6~7대를 댈 수 있을 만큼 제법 넓다. 등산로 입구에 부항천 발원지 ‘물부리터샘’ 표석이 있고, 바로 옆에 백두대간 안내판이 눈에 띈다. 백두대간은 조선 영조 때의 실학자 신경준이 ‘산경표’에서 정리한 우리나라의 산맥 분포표다. 백두산에서 시작해 금강산 설악산을 거쳐 지리산까지 약 1,400㎞ 이어지는 한반도의 중심 산줄기인데, 이곳 삼도봉 일대도 그 줄기에 포함된다는 이야기를 장황하게 써 놓았다. 인근 속리산이나 덕유산에 비하면 지명도가 떨어지는 봉우리이니 자연히 설명이 길어진 듯하다.
산은 언제나 공평하다. 산줄기의 8부 능선까지 차량으로 거저 올라왔으니 등산로는 시작부터 가파르다. 숨이 턱에 찰 정도로 돌계단과 나무계단이 계속된다. 지그재그 계단으로 고층 빌딩을 오르는 것과 비슷하다. 좌로 우로 가파르게 휘어지는 길이 쉽지 않은데, 경사 심한 비탈길로 질러가는 산꾼도 더러 있는 모양이다. 위험하니 등산로를 벗어나지 말라는 경고 문구가 곳곳에 붙어 있다. 나뭇잎마저 모두 떨어져 삭막한 산길에 조리대가 싱그러운 초록을 선사하고 있어 그나마 위안이다.
이제 곧 능선이겠지, 조바심이 날 즈음 ‘산삼약수터’가 반긴다. 누군가가 우물처럼 차곡차곡 돌무더기를 쌓았는데, 중간에 끼워 놓은 호스에서 물줄기가 졸졸 떨어진다. 흔히 말하는 ‘산삼 썩은 물’은 아니겠지만, 목마른 등산객에게 보약 같은 약수임에 틀림없다. 약수 한 모금으로 힘을 내 조금만 오르면 백두대간 능선이다.
짙은 안개 속에 바람소리마저 고요했던 산자락과 달리 칼바람이 몰아친다. 주변 풍광은 갑자기 설국으로 변했다. 헐벗은 겨울나무 가지마다 하얀 눈꽃이 피었다. 실제 눈이 내린 건 아니고 습기가 얼어붙어 형성된 상고대다. 거센 바람에도 올겨울 처음 맞이하는 설경에 추위를 잊는다. 이곳에서 삼도봉 정상까지는 경사가 완만해 발걸음도 한결 가볍다.
삼도봉은 조선 태종 14년(1414) 전국을 ８도로 분할하면서 경상 전라 충청의 분기점이 된 후 지리적ㆍ행정적 경계로 굳어졌다. 대단한 무엇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정상은 생각보다 황량했다. 목재 덱으로 덮인 봉우리 중앙에 ‘삼도봉 대화합 기념비’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거북 기단에 세 마리 용이 여의주를 이고 있는 형상이다. ‘삼도 대화합의 새로운 장을 열면서 소백산맥의 우뚝 솟은 봉우리에 인접 군민의 뜻으로 이 탑을 세우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매년 10월 10일엔 삼도의 산악인과 주민이 제를 지내며 화합을 기원한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좋은 말뜻에도 불구하고 강박적으로 ‘화합’을 강요하는 수준이다. ‘지역감정’이라는 말이 정치적으로 악용될 때의 유산이다.
현재는 김천에서 무주와 영동을 잇는 고갯길에도 도로가 개설된 상태다. 부항령 아래 삼도봉터널(1999년 개통)을 통과하면 무주 설천면이고, 우두령을 넘으면 영동 상촌면이다. 탑에 새긴 무주와 영동은 아는 그대로인데, 김천의 지명은 ‘금릉군’으로 표기돼 있다. 탑을 세운 건 30년 전인 1990년이고 금릉군은 1995년 김천시와 통합했다.
하나를 취하면 하나를 버려야 하는 게 세상의 이치인 모양이다. 상고대가 빚은 설경은 뜻밖의 선물이었지만, 바람은 매섭고 짙은 안개는 끝내 걷히지 않았다. 산정에서만 볼 수 있는 넓고 장쾌한 풍광은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고 오로지 걷는 것에만 집중하며 산을 내려온다. 무욕의 산, 삼도봉은 또 그렇게 겸손을 가르친다.
부항면 소재지는 아마 전국의 면소재지 중에서 터가 가장 협소할 듯하다. 좁은 계곡을 흘러내린 산자락엔 평지가 거의 없어 면사무소는 사등리 마을에, 초등학교와 우체국 등은 2km가량 떨어진 계곡 상류의 월곡리 마을에 자리 잡았다.
삼도봉 자락은 깊은 산골인 만큼 해방 정국에서 빨치산의 활동이 극심한 곳이었다. 부항파출소 옆에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부항지서 망루가 있다. 4면이 반듯한 7m 높이 콘크리트 방어 시설이다. 1948년 12월부터 부항면 일대에 빨치산이 출몰해 지서를 습격하자 주민들은 진지를 구축하기로 하고 유지들의 찬조금을 받아 망루를 세웠다. 이듬해에는 망루에서 20ｍ가량 떨어진 지서를 연결하는 지하 통로와 나무 울타리도 만들었다. 한국전쟁 기간인 1951년 10월엔 인천상륙작전으로 도주로가 차단된 북한군과 빨치산 1,000명이 '불꽃사단'을 조직해 2회에 걸쳐 부항지서를 습격했는데, 그때도 이 망루를 거점으로 공격을 막아냈다. 당시 전투로 양철 지붕이 불타고 콘크리트 구조물만 남아 방치되던 것을 2013년 복원했다. 현재 망루 위의 두 병사 인형이 인적 드문 산골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망루에서 보이는 도로를 따라 가면 무주로 넘어가는 부항령이다.
삼도봉 아래 첫 마을은 해인리(海印里)다. 신라시대에 마을 뒤 골짜기에 큰 절이 있었는데, 합천으로 옮아간 해인사라는 설이 전해온다. 지명의 유래가 대부분 그렇듯 확인할 길은 없다. 깊은 산골짜기지만 가구 수에 비해 들이 제법 있어 마을이 옹색하게만 보이지는 않는다. 계곡 주변 비탈밭엔 감나무와 호두나무가 많다. 호두는 포도와 함께 김천을 대표하는 과일이다. 오징어 먹물을 섞어 반죽한 호두먹빵은 요즘 김천에서 뜨는 간식거리다. 팥 앙꼬에 호두 조각이 듬뿍 들어가 오독오독 씹는 맛이 일품이다. 고급 호두과자라 할 수 있겠다.
부항댐과 호수는 산밖에 없던 지역의 새로운 자랑거리다. 2002년 태풍 루사가 한반도에 엄청난 피해를 남긴 후 이상 기후와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만든 댐으로 2013년 완공됐다. 이후 댐 양쪽에 93m 국내 최고 높이의 타워를 연결하는 집와이어와 256m 길이의 출렁다리를 설치해 김천을 대표하는 관광지로 부상하고 있다. 국내 최장이라 자랑하던 출렁다리는 개통 2개월 만에 예산 예당호 출렁다리에 그 지위를 넘겨줬지만 물 위를 걷는 스릴과 호수의 아름다움은 그대로다. 호수 둘레에도 산책로가 조성돼 있어 산마을과 호수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