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변주된 LP 문화, 코로나 시대 힐링되다

입력
2020.11.25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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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에 턴테이블이 천천히 돌아간다. 화면을 보던 여성은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어 레코드의 질감을 살려 만든 검은 파라솔을 가만히 손으로 쓸어 내린다. 낡은 레코드 음반 표지와 수록곡이 영화 자막처럼 올라간다. 작가 장유정의 ‘손길이 필요한 일’은 레코드를 시각, 청각, 촉각이 동원되는 아주 사적인 경험으로 재해석했다.

#상록수와 이끼가 빼곡한 전시장에 식물을 위한 레코드 음반 ‘플랜타지아’가 재생된다. 이 음반은 1970년대 미국의 한 인테리어 매장에서 식물로 집안을 꾸미는 인테리어가 유행하자 식물을 구매하거나 침대를 사는 사람에게 배포했던 사은품이었다. 디자이너 이선미와 베리구즈(박혜미, 김새롬), 수집가 레몬의 협업 작품인 ‘에버그린(Ever Green)’은 식물과 레코드가 공통적으로 가진 위로의 의미를 극대화했다.

25일 서울 중구 문화역서울 284에서 개막한 ‘레코드284-문화를 재생하다’전은 추억의 레코드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전시다. 단순히 음악 저장매체를 넘어 일상에 새로운 감각과 경험을 불어넣는 창작의 원동력, 그 가능성에 주목한다.


전시는 레코드의 역사부터 훑는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LP의 전 제작 공정을 갖춘 기업 마장뮤직앤픽처스의 역사를 통해 레코드의 발전과정을 살필 수 있다. 대중가수 음반 표지 사진 전문작가 안성진이 추린 레코드 표지 15점도 전시된다. 희귀음반과 전문가들이 추린 레코드 명반, 1960~1980년대 턴테이블 등도 나온다.



전시의 백미는 레코드를 새롭게 해석한 현대 디자이너 10팀의 작품이다. 디자이너 문성원과 디자인 스튜디오 오리진(Orijeen)은 재생을 위해 끊임없이 회전하는 레코드의 물리적 특성에 착안한 회전 작품을 선보인다. 디자인 스튜디오 비 포메티브는 시대에 따라 목재에서 다양한 소재로 변화해온 레코드 가구에 주목했다. 이들은 레코드를 수납하는 가구 시리즈 ‘DC-20’을 선보인다. 레코드를 듣는 일련의 과정을 상상력을 더해 시각화한 작품 ‘사운드 메이커’ 등을 선보인 스튜디오 워드는 “한 앨범을 듣기 위해 레코드를 꺼내고 트랙에 맞춰 바늘을 정확히 올려야 하는 수고로운 과정과 노력이 수반되기 때문에 레코드는 음악을 대하는 태도부터 다르다”고 설명했다. 전시를 기획한 권정민 객원 큐레이터는 “레코드 문화는 번거롭지만 듣는 행위를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경험을 선사하며, 디지털 문화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위안을 준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는 문화역서울 284외에 성수동 로스트성수, 연남동 사운즈굿, 한남동 챕터원 등 서울 시내 복합문화공간 9곳에서 나뉘어 전시된다. 온라인 플랫폼에서 디제이들의 라이브 공연과 작품 영상 등을 볼 수 있다. 전시는 12월 31일까지.

강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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