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를 듣는다. 비발디의 사계가 아니라, 짧은 샤쓰, 짧은 치마 뜨거운 여름. 소금 땀 비지땀 흐르고 또 흘러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밤낮 없이 재봉틀을 돌려야 하는 ‘시다’들이 주인공인 노래. 듣고 있으면 가슴이 서늘해지는 노래. 나와 내 또래들이 뜬금없이 X세대로 임명되었던 1994년, 그 해 여름에도 나는 이 노래를 들었다. 남들이 X세대라고 하길래 X세대답게 청바지를 찢어 입고 다니고 싶었지만, 그러려면 일단 청바지를 사야했기에 아파트 공사판에서 방학을 보내기로 했다.
야, 너 저기 가서 오함마 좀 가져 와라.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맡은 첫 번째 임무였다. 오함마? 오함마라. 오함마가 뭐지? 하늘도 무심하시지. 난생 처음 하는 노가다 아르바이트인데, 출근하자마자 이런 시련을 주다니. 차마 오함마가 뭔지 모른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뭐 연장이라고 해봐야 별거 있겠어? 대충 잘 찍어서 오함마처럼 생긴 걸 들고 오자. 쭈뼛쭈뼛 여러 연장들 사이에서 ‘오함마’처럼 생긴 것을 찾아보았다. 물론 어이, 나야 오함마, 라고 손짓하는 연장이 없었기에 손에 잡히는 대로 어른 팔뚝만한 망치를 들고 십장 앞으로 갔다. 십장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야, 너는 대학생이 오함마도 모르냐?
십 수 년 뒤. 나는 일요일마다 열리는 복지관 한국어 교실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주유소에서 사용할 수 있는 표현을 가르치고 있었다. 기름을 가득 채워 달라는 말을 설명했지만, 학생들은 잘 이해하지 못했다. 보다 못해 탱크에 기름이 가득 차 있는 장면을 칠판에 그려주자 방글라데시에서 온 학생이 크게 깨달았다는 듯 소리쳤다. 아아, 이빠이! 학생의 눈빛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아니, 선생님, 어떻게 이빠이도 모릅니까?
철두철미한 언어 경찰을 자임해야 하는 자로서 이 글의 다음 내용은 이래야 한다. 각종 노동 현장에 아직도 일본어의 잔재가 ‘뿌리 뽑히지’ 않고 남아있는 것을 개탄하고, 하루 빨리 힘을 모아 이런 저급한 언어들을 ‘순화’해야 한다고 이 연사 힘차게 외쳐야 한다.
이렇게 우리는 너무나 손쉽게, 아니 거의 반자동적으로 노동 현장의 언어들을 순화의 대상으로, 빨리 처리해야 할 오염된 폐기물로 분류한다. 이런 언어들은 감금되어야 할 언어, 사회와 격리되어야 할 언어, 최소한 저쪽 구석으로 치워버리고 눈길도 관심도 주지 말아야 할 언어이다. 이런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목소리? 들어서 뭐 하겠나?
그런데 나는 불온하게 자꾸 이런 질문을 떠올린다. 언어학자들은 공장으로, 건설 현장으로 찾아 가서 그 공간의 사람들이 어떤 말을 사용하고, 어떻게 대화하는지 진지하게 탐구해 본 적이 있는가? 언어 청소부로서의 정체성을 버리고 말이다. 나 자신부터도 찔리는 말이지만, 언어학자들은 공장으로, 공사판으로 가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언어학은 노동하는 인간의 언어에는 관심이 없다. 언어학은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언어 자료를 다룰 것 같지만 돈 놓고 돈 먹는 세상에서 설마 그럴 리가. 언어학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자본을 움직이는 자들의 언어, 자본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언어, 또는 자본을 대변하는 국가의 ‘정상 언어’이다. (AI에게 음성을 인식시키고 말하게 하는 기술, 대량의 언어 자료에서 돈이 되는 정보를 추출해내는 기술의 많은 부분은 언어학과 연관되어 있다. 현대 언어학은 그렇게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니까 다른 학문 분야처럼(그렇다, 물귀신 작전이다) 본래부터 언어학은 근대 부르주아 국민국가의 국가장치로 기능해 왔다.
이 국가장치가 충실하게 수행하는 일 중 하나는 언어를 정상적인 범주와 비정상적인 범주로 구분하는 것이다. 이런 범주의 구분은 그 자체로 권력으로 작동한다. 이렇게 비정상적인 범주로 분류된 언어들, 다시 말해 순화해야 할 범주의 언어들은 2등 시민의 언어가 된다.
그리하여 노동하는 삶 속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들은 정작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로부터 소외된다. 생각해보라. 건설업 종사자들이 점점 자신의 하는 일에 숙련되어 갈수록 이들은 점점 더 많은 일본어투의 말들을 능숙하게 사용하게 될 것이다. 개인적 차원에서 이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자랑스러워해야 하는 일이다. 이 말들은 땀을 흘리며 그들의 몸으로 익힌 언어, 직업인으로서 자신의 능력이 얼마만큼 성장했는지 보여주는 언어이기 때문이다.(건설 현장이라는 곳에 일하러 가서 오함마도 찾지 못하는 어떤 얼간이와 비교해 보라.) 그러나 자신의 발화를 국가의 눈으로 바라보는 순간, 그들의 언어 사용은 손가락질 당해 마땅한 것으로 몰락한다.
물론 이런 잣대가 모든 직업군에게 공평하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소통의 용이성을 저해한다는 점에서 의학 용어도 만만치 않지만, 우리는 드라마 속 의사들의 의학 용어 사용을 마법사의 신비한 주문을 보는 것 마냥 감탄하면서 시청한다. 윙가르디움 레비오사! 루모스! 블리딩(출혈)! 앱도미널 디스텐션(복부 팽창)! 컨스티테이션(변비)! 가스 아웃(방귀)! 에잇! 안되겠군! 아브다 케다브..앗! 여기까지.
경탄이 아니라 경멸의 시선을 받아왔지만, 노동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버리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언어를 어떻게 그들의 몸에서, 그들의 노동에서 떼어내겠는가? 사계의 노래 가사처럼 노동하는 이들은 계절이 지나가도 하루하루 묵묵히 ‘공구리’를 치고, ‘미싱’을 돌릴 뿐이다.
반면 자본의 언어는 쉴 새 없이 몸을 바꿔 화려하게 변신한다. 우리는 이제 창조 경제를 해야 합니다. 창조 경제가 뭔가요? 우주가 우리를 도와주는 게 창조 경제죠. 하하. 자 여기 조명을 잔뜩 쏘아 주세요. 그 조명의 그늘은 일하다가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모습을 숨긴다. 자 4차 산업 혁명의 시대가 왔어요. 4차 산업 혁명이 뭔가요? 4차 산업 혁명은 네 번째 산업 혁명이라는 뜻이에요. 어차피 몇 번째인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그냥 좋은 거 하자는 거지. 하하. 자 여기 빨리 조명요! 저 조명은 강한 빛으로 여전히 일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가린다. 아, 이제는 뉴노멀의 시대예요. 뉴노멀이 뭔가요? 갑자기 안 시키던 거 시켜도 그러려니 하며 일상으로 받아들이고 그냥 하라는 뜻이에요. 하하. 여기도 조명요! 마지막으로 우리 그린 뉴딜이라는 걸 해보죠. 저기요, 근데 이게 정말 그린 뉴딜이에요? 하하, 그냥 좋게 생각하세요. 의도가 좋잖아요. 여기, 더 많은 조명이 필요해요. 그렇게 사람들은 또 죽어가겠지.
오함마는 건물을 올리고, 미싱은 옷을 짓지만 저 구호들은 공갈빵 같이 공허하다. 그런 구호 아래 사람들은 불나방처럼 꼬였다가 다시 새로운 구호로 달려든다. 이 고상한 언어들이 끊임없이 변신을 하는 이유는 똑같다. 착시 효과를 일으켜 부조리와 불평등을 은폐하기 위해서다. 예컨대 똑같은 노동을 하지만 비정규직이라는 말은 차별을 정당화하고, 플랫폼 노동이라는 말로 자발적 착취를 가능케 한다. 이런 언어들 아래에서 사람들은 죽어 가는데, 자유니 민주니 국민이니 세상의 온갖 좋은 말들을 돌리고 돌려쓰는 저기 여의도 모래섬 위의 무리들은 사람을 살리는 문장 하나 제대로 짓지 못한다.
계절이 지나고 또 지나면 국가와 자본은 또 새로운 구호를 들고 나와 세상을 흔들고, 그 구호에 일하는 사람들의 죽음은 여전히 가려질 것이다. 4차 산업 혁명이 뭔지, 뉴노멀이 뭔지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부끄럽지 않다. 하지만 공사판에서 오함마를 몰라 헤매던 내 모습, 노동 현장의 언어를 그저 순화의 대상으로만 여기던 내 모습은 부끄럽다.
우리네 청춘이 저물고 저물도록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노래는 이제 겨울로 접어든다. 노래를 들으며 땀내 나는 노동의 단어들을 생각한다. 그러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되묻게 된다. 저 언어들은 정말 불순한가? 정말 불순한 언어는 과연 무엇인가? ‘미싱’인가 아니면 저 위선의 구호들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