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년 전 기와지붕에 올라 불 끄던 미국 소방관을 아시나요

입력
2020.11.17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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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1965년 대구 주한미군서 소방관으로 일한 
페이 쉘라씨


대구의 한 한옥에서 불이 나 주변이 매캐한 연기로 가득 찼다. 불길은 번져 세간을 순식간에 태웠고, 빨리 불길을 잡지 않으면 옆집으로 옮겨 붙을 기세였다.

소방관은 앞서 불을 끈 기와로 된 지붕에 올라 호스를 부여잡고, 불길이 번진 건너편에 물을 퍼부었다. 화재로 일부 기와가 손실된 지붕에 왼쪽 무릎을 대고 진화에 나선 소방관은 자칫하면 중심을 잃고 미끄러질 듯 보였다. 대신 빨리 불길을 잡으려는 듯 표정은 비장했다.

1964~1965년 대구에서 화재를 진압하던 한 소방관의 모습이다. 주인공은 바로 주한 미군 소방관인 페이 쉘라씨.



한국 전통 가옥에서 난 불을 잡는 미국 소방관의 모습은 최근 소방청에 이메일로 사진이 전달되면서 확인됐다.

17일 소방청에 따르면 쉘라씨의 딸인 크리스티 쉘라(45)씨는 지난 10일 소방청에 자신의 아버지가 대구에서 일했을 때 찍은 사진 10장을 보냈다.

딸의 아버지는 1964년 주한 미군 소방관으로 대구에서 2년 동안 근무했다. 한국에서 일을 한 아버지를 따라 미국 워싱턴DC에 사는 크리스티 쉘라씨도 스마트시티 건설 관련 한국의 기관과 일을 하며 한국과 연을 잇고 있다. 올해 초 페이 쉘라씨가 눈을 감자 딸이 그의 아버지와 한국의 추억을 한국 사람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 50년을 훌쩍 넘은 사진을 소방청에 보냈다고 한다.

크리스티 쉘라씨는 "아버지는 대구에서 한국인 동료들과 현장에 출동해 화재를 진압했던 경험을 비롯해 2년 동안의 한국 생활을 늘 그리워했다"며 "한국 어린이들과의 즐거웠던 추억을 늘 가족에게 들려줬다"고 전했다.


크리스티 쉘라씨는 '아이스께끼'란 말도 알고 있었다. 당시 대구 미군기지 주변에 살던 그의 아버지는 아이들과 친하게 지냈다는 게 딸의 설명. 미국인 소방관의 주위엔 '아이스께끼'를 찾는 아이들이 늘 몰렸다. 이 얘기를 딸에게 여러차례하면서, 크리스티 쉘라씨에게도 정체불명의 '아이스께끼'란 말이 각인된 셈이다.

페이 쉘라씨는 1965년 미국 네브래스카주로 돌아간 뒤 한 해 뒤인 1966년 허리가 아파 소방관을 그만뒀다. 이후 농무부(USDA) 식품영양국 등을 거치며 2000년까지 공무원으로 일했다. 그의 딸은 올해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한국에서 소방관으로 일했던 당시의 사진을 발견했다. 이 사진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리면서 자연스럽게 소방청과 연락이 닿았다.

크리스티 쉘라씨는 "아버지가 생전에 그토록 그리워하고 사랑했던 한국과 당시에 함께 근무했던 한국인 동료들을 만나 볼 수 있기를 원했다"며 "수소문을 했었지만 찾을 수 없어 안타까워했다"는 사연도 들려줬다.

안타까운 사연을 접한 소방청은 페이 쉘라씨와 당시 함께 일한 한국인 동료가 있을 것이라 보고 미8군 소방대의 협조를 얻어 사진 속의 사람들을 찾기로 했다. 크리스티 쉘라씨가 보낸 10장의 사진 중엔 페이 쉘라씨가 한국인 동료와 함께 소방 훈련을 하는 모습 등이 담겨 있다.


크리스티 쉘라씨가 한국에 보낸 사진은 광복 후 소방 변화를 보여주기도 한다.

한 사진엔 미군 소방대원들과 불을 끄는 한국인 소방관이 'USA FD(Fire Department)'란 영문이 새겨진 헬멧을 쓰고 있다.

소방청 관계자는 "일제강점기 일본식 시스템으로 운영되던 소방은 미군 부대를 통해 들어온 소방장비와 시스템으로 한국 소방이 선진화는 전환점이 됐다"고 설명했다.



양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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