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는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 걸까. 오늘날 우리 인류는 소비와 소비문화가 갈수록 중요해지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정체성에서 이제 소비는 핵심 영역을 차지한다. 사회학자 로버트 보콕의 책 ‘소비(Consumption)’의 우리말 부제처럼,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사회학자들과 문화학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사회가 ‘생산 중심 사회’에서 ‘소비 중심 사회’로 변화했다고 분석했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유기적으로 결합하면서 다수의 시민들은 의식주는 물론 여가까지의 상품들을 다양하게 소비할 수 있는 시대를 맞이하게 됐다.
전통적으로 소비가 사회의 주요 관심사는 아니었다. 생산이 사회 활동에서 더 중요한 일로 생각됐고, 소비는 생산의 부산물로 파악됐다. 소비는 일종의 낭비이자 쾌락으로 평가절하돼 왔고, 그 결과 소비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문화가 형성됐다.
하지만 소비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소비는 이제 인류의 삶과 일상을 이루는 주요 영역으로 부상했다. 이러한 변화는 소비가 개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가 됐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오늘날 개인의 삶에서 어떤 일을 하느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무슨 옷을 입고, 어디서 식사를 하며, 어느 곳에서 사느냐다. 소비는 이제 한 개인의 계급적ㆍ사회적 정체성을 보여주는 지표로 기능한다.
사회학과 문화학에서 이러한 소비에 대해 주목할 이론을 내놓은 이들로는 소스타인 베블런, 장 보드리야르, 피에르 부르디외를 들 수 있다.
베블런은 고전적 저작 ‘유한계급론’(1899)에서 ‘과시적 소비’라는 개념을 주조했다. 과시적 소비란 화폐의 위력과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기 위해 소비하는 것을 말한다. 과시적 소비는 소비의 목적이 개인적 효용 추구가 아닌 위세와 명성과 같은 사회적 상징으로 변화했음을 보여준다. 이른바 명품 소비는 이 과시적 소비의 대표적 사례였다.
보드리야르는 문제적 저작 ‘소비의 사회’(1970)에서 사물이 소비체계에 의해 기호화돼 수용된다고 파악했다. 소비에는 상품의 효용 못지않게 그 기호가 중요하다. 다시 말해, 소비는 상품에 담긴 기호를 소비하는 것이고, 이는 소비와 소비자 간의 차이를 낳는다고 보드리야르는 주장했다.
부르디외는 현대의 고전 ‘구별 짓기’(1979)에서 ‘아비튀스’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소비의 차별화 현상을 분석했다. 아비튀스란 사회화되고 구조화된 취향이다. 이 취향은 개인의 내부에 체화된 개별적 성향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개인이 놓인 사회적 위치를 반영한다. 부르디외가 전달하려는 바는 취향에 따른 소비의 차별화가 계급적 차이를 드러내기 위한 구별 짓기 전략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일련의 이론들은 서구사회에서 소비가 물질적 욕구 충족을 넘어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자리 잡았음을 증거했다. 이제 소비는 개인에게 이미지와 스타일, 개성과 자유, 쾌락과 환상을 표현하는 수단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요컨대, 소비는 후기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욕망과 정체성을 드러내는 하나의 문화적 생활양식으로 볼 수 있다.
베블런, 보드리야르, 부르디외가 소비에 대해 대체로 부정적 시선을 보여주는 반면, 사회학자 콜린 캠벨과 철학자 미셀 드 세르토는 상대적으로 그 긍정적 시각을 대변한다.
캠벨은 ‘낭만주의 윤리와 근대 소비주의 정신’(1987)에서 소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다. 캠벨에 따르면, 낭만주의 윤리는 직관을 중시하고 욕망과 쾌락을 추구한다. 이 낭만주의 윤리는 소비 활동에서 진정성을 추구하는 중간계급의 가치로 뿌리 내린다. 하지만 구입한 상품에 대한 만족이 이내 사라지면, 새로운 욕망과 쾌락을 다시 추구하게 된다. 낭만주의 윤리가 소비주의 정신을 고취하고, 소비자의 끝없는 욕망이 자본주의를 전진시킨다는 게 캠벨의 논리다.
흥미로운 것은 캠벨이 소비를 부정적으로만 파악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소비를 향한 인간의 내밀한 욕망 추구가 자아실현을 위한 필요조건을 이룬다고 캠벨은 강조한다. 이러한 견해는, 생존에서 풍요로 서구 사회생활의 흐름이 변화한 이후, 특히 젊은 세대에게 개성적 취향과 이에 따른 소비문화가 중요해진 까닭을 설명해준다.
드 세르토 역시 ‘일상생활의 실천’(1984)에서 소비가 일상의 적극적 구성 요소임을 주장한다. 소비는 계급에 구속된 행위이자 지위를 과시하는 행위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에게 만족감·즐거움·기쁨을 선사하는 주체적 행위이기도 하다. 앞서 말한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는 21세기 소비의 부정하기 어려운 자화상이라 할 수 있다.
21세기 소비 시대에서 주목할 또 하나의 현상은 소비의 세계화다. 1980년대 이후 본격화된 세계화는 경제 영역에 이어 문화 영역의 세계화를 촉진시켰다. 그 결과, 뉴스, 영화, 티브이 프로그램, 음악, 게임, 여가 등 소비문화의 세계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됐고, 이 세계화는 특히 미국의 소비문화가 지구적으로 확산돼 평준화되는 ‘문화의 표준화’ 현상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소비문화의 세계화에 대해선 그 평가가 엇갈렸다. 어떤 이들은 문화의 획일성과 그로 인한 민족문화의 위기에 대해 우려한 반면, 다른 이들은 그 세계화가 낳아온 다양한 ‘하이브리드(혼종) 문화들’의 등장에 주목했다. 21세기에 들어와 비서구사회에선 이런 상반된 두 경향이 공존해 왔다고 볼 수 있다.
2020년대에 소비의 미래는 그렇다면 어떻게 볼 수 있을까. 두 가지를 주목하고 싶다.
첫째, 소비가 갖는 중요성이 증대할 것이다.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후기 현대사회가 도래하면서 개인주의가 강화될 수밖에 없다고 분석한 바 있다. 이제 개인은 자신의 독립적 정체성을 이루는 삶의 의미를 능동적으로 구성해야 하는 과제를 떠안고 있다. 이러한 정체성의 형성에서 의식주, 문화, 여가의 소비에 대한 선택은 갈수록 중요해질 것이다.
둘째, 그렇다고 이러한 소비를 일방적으로 예찬할 수만은 없다. 우리가 소비를 통해 얻으려고 하는 것은 행복의 감정이다. 그런데 행복감을 정의하기란 쉽고도 어렵다. 일반적으로 행복이란 만족감ㆍ즐거움ㆍ기쁨이 존재하는 마음의 상태다.
문제는 이 행복감이 오늘날 사람마다 다르다는 데 있다. 행복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존재한다. 만족감ㆍ즐거움ㆍ기쁨의 대상은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또, 어떤 이에겐 더 많은 소비가, 어떤 이에겐 더 적은 소비가, 다른 이에겐 이른바 ‘착한 소비’가 중요할 것이다. 소비를 일방적으로 비판하지 않되, 소비에 담긴 인간적ㆍ사회적 의미를 성찰해야 할 시대 앞에 우리 인류는 서 있다고 봐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소비 시대가 열린 것은 1980년대 후반 이후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유기적 결합이 이뤄지면서 소비와 소비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베블런이 말한 과시적 소비로서의 명품 소비가 본격화된 것도 이 즈음부터였다.
우리 사회 소비문화에서 최근 흥미로운 현상은 소확행(小確幸)이다. 이 개념의 기원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집 ‘랑겔한스섬의 오후’(1986)다. 갓 구워낸 빵을 손으로 찢어서 먹는 것, 겨울밤 부스럭 소리를 내며 이불 속으로 들어오는 고양이의 감촉 등이 바로 행복이라는 메시지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인 이 소확행에 앞서 존재했던 것은 ‘웰빙’, ‘힐링’, ‘욜로’ 등이었다. 널리 알려진 김난도 등의 ‘트렌드 코리아 2018’에 따르면, 소확행은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라’는 욜로가 구체화된 모습이다. 이 소확행은 우리 시대의 현실을 반영한다. 그것은 학업ㆍ취업ㆍ결혼으로 이어지는 생애주기의 자연스러운 진화가 어려워지면서 채워지기 어려운 미래의 욕망보다 당장 이룰 수 있는 현재의 행복을 찾겠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소확행을 바라보는 데는 서로 다른 시각이 존재한다. 어떤 이들은 소소하지만 중요한 일상의 발견을 주목한 반면, 다른 이들은 젊은 세대의 좌절이 담겨 있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포스트신자유주의의 새로운 이데올로기라는 과감한 주장까지 나와 있다.
이러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소확행이 제기하는 행복의 질문은 결코 가볍지 않다. 삶이 일상의 연속이라면, 일상이 행복하지 않은데 인생이 행복할 리 없다. 소확행을 일방적으로 예찬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소비와 소비문화가 우리 사회에서 갈수록 중요해지며, 따라서 앞서 말했듯 소비의 의미에 대한 새로운 사유가 요구된다고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