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로방지 대책, 우리 같은 중소업체 택배기사도 바뀔까요?"

입력
2020.11.13 20:00
주5일 근무, 심야배달 제한 등 정부 대책 불구
5분의 1에 해당하는 중소택배기사들은 '우울'
"대형사 빠지면 업무량 우리에게 몰릴 것" 부정적

“택배없는 날(8월 14일)로 지정한 때도 못 쉬었거든요. 이번에도 아마 해당이 안 될 겁니다.”

정부가 심야배송 제한과 주5일 근무 권고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택배기사 과로방지 대책’을 발표한 다음날인 13일. 택배기사 황선우(가명ㆍ45)씨는 힘없이 말했다. 중소 택배회사 소속인 황씨는 지난 8월 고용노동부와 대형 택배사들이 시행한 택배 없는 날에도 일을 했다. 택배사 사정에 따라 참여여부를 자율에 맡기다 보니 그가 일하는 회사는 정상 배송을 한 것이다. 황씨는 “그때 대형 택배사가 쉬면서 우리는 평소보다 물량이 많아져 오히려 바빴다”며 "이번 대책 시행 이후에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질 것 같다"고 말했다.

정부가 택배기사의 건강을 보호하고 택배사의 불공정 관행을 개선하기 위해 대책을 내놨지만 벌써부터 실효성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심야배송 제한 ‘권고’, 주 5일제 근무 확산 ‘유도’ 등 대책의 강제성이 없어 이행여부가 사실상 택배회사의 선의에 달려있어서다.

황씨 같은 중소업체 택배기사들의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택배업계 ‘빅(BIG) 4’ 업체인 CJ대한통운ㆍ한진ㆍ롯데ㆍ로젠 등은 자사 기사들의 과로사 추정 사망이 이어지자 분류인력 투입, 산재보험 가입 의무화 등을 약속했다. 공개적인 대책을 내놓은 만큼 이행 의지를 보일 거라는 얘기다. 반면 나머지 10여개 중소 업체들은 선뜻 나서지 않고 있다. "빅4 업체에 비해 물량과 수입이 적어 이행이 어렵다"는 이유다.

정부는 모든 택배업체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 '과로사 방지 협의체'를 만들기로 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이는 현실성이 낮아보인다. 김세규 전국택배연대노조 교선국장은 “한국통합물류협회가 협의체에 참여하기 때문에 중소택배회사들도 형식적으로는 논의에는 참여한다”면서도 “통합물류협회가 영세한 업체에까지 실제 협의 이행을 강요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의 감시망이 중소 업체에까지 미치지 않는 것도 문제다. 현재 고용노동부가 실시하고 있는 택배회사 안전보건 감독은 대형 택배사의 터미널ㆍ대리점 일부만을 대상으로 한다. 빅4 업체의 택배물량 점유율이 95%에 달하고 과로사 문제도 많았다는 이유다. 하지만 올해 등록 택배기사 5만4,000명 중 약 1만1,000명이 중소 택배사 소속이다. 영세업체에서 일한다는 이유로 택배기사 5명 중 1명이 정부 관리의 사각지대에 놓인 것이다.

표준계약서 마련이 내년으로 미뤄진 것도 중소업체 기사들 입장에선 아쉬운 부분이다. 영세업체는 상대적으로 물량이 적어 배송 강도가 다소 덜하지만, 고액 권리금 수수나 부당해고 등 불합리한 조건에 더 시달리기 때문이다. 택배기사 이진우(가명ㆍ52)씨는 “동료가 지난 장마 때 배송하던 물건이 침수돼 금액을 다 물었는데, 며칠 안돼 계약 해지까지 됐다”며 “배송 중 문제를 다 떠안는 방식의 계약을 맺지만, 돈을 벌어야하는 입장에선 거부하기가 힘들다”고 말했다.

법적 구속력이 보완되지 않는다면 중소 택배사는 물론 대형 업체에서도 노동환경 개선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지적이다. 3년 전인 2017년 국토교통부가 이번 대책과 동일한 내용을 담은 ‘택배서비스 발전방안’을 내놓았지만 제대로 이행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김성희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교수는 “정부로서도 대책을 강제할 법적 수단이 없는 상황이고, 더욱이 사회적 관심 밖에 있는 중소 업체들은 노동조건 개선에 더욱 소극적일 것”이라며 “입법을 통해 택배기사의 근로자성을 인정하고 정부가 근로감독 등 행정조치를 하는 게 근본적인 대책”이라고 말했다.

세종= 신혜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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