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유신론 종교처럼, 신이라는 사후 심판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사후 심판의 개념이나 구조가 완전히 다르다. 유신론 종교는 ‘신을 믿느냐’에 따라서, 천국과 지옥행이 나뉘며 각기 그곳에서 영생한다. 즉 영원한 행복과 고통이, 인간의 관점과는 무관하게 신 중심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는 윤회론을 기반으로 하므로 천상과 지옥 역시 영생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상의 신도 노력하지 않으면 노쇠(五衰相) 속에 죽는다. 이는 지옥도 마찬가지다. 마치 형기를 마치면 죄수도 일반인이 되는 것처럼…
불교의 천상과 지옥에는 심판자가 없으므로 신에 대한 믿음 역시 존재할 필요가 없다. 검수지옥에 대한 이야기는 불교의 지옥이 의미하는 고통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잘 나타내 준다.
검수지옥이란, ‘잎과 가지가 칼날로 된 나무의 지옥’이라는 의미다. 이곳은 이성에 대한 애욕이 강한 이들이 가는 지옥이다. 이 지옥에 떨어진 사람은 칼날 나무의 꼭대기에 나체의 이상형이 자신을 유혹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애욕에 눈먼 이는 칼날에 베이더라도 그곳으로 올라간다. 그런데 이때 나무의 칼날은 죄다 아래를 향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온몸을 베이며 정상에 올라가면, 이상형은 홀연 나무 아래로 내려와 있고 이번에는 나무의 칼날이 일제히 위를 향한다. 시시포스 신화의 반복처럼, 이 행동은 애욕이 사라질 때까지 계속된다.
검수지옥의 이야기는 무척 흥미롭다. 왜냐하면 이곳에는 고통을 주는 주체가 없기 때문이다. 이곳의 고통은 신의 징벌도 아니고, 지옥의 옥졸에 의한 겁박도 아니다. 다만 통제하지 못하는 애욕에 의해, 스스로가 반복되는 고통을 가하는 구조일 뿐이다. 애욕만 놓아버리면, 검수지옥은 아무 문제 될 것이 없다. 이와 같은 고통의 구조가 바로 불교의 지옥이다. 마치 스스로의 선택으로 골초가 되고, 담배로 인한 질환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처럼…
지옥과 마찬가지로 천상의 신들 역시 선한 노력을 계속하지 않으면, 서서히 빛을 잃어가며 죽게 된다. 한때 2,000만이라는 어마무시한 회원을 자랑했던 싸이월드가 끝내 폐쇄된 것처럼, 거듭나지 못한 신들 역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불교의 천상과 지옥을 관통하는 핵심은 ‘선한 노력과 잘못한 집착의 탈각’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어떻게 살 것이냐’에 따라서 결정되는 과보의 연장선상 속에, 불교의 천상과 지옥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후일 동아시아 불교에서는 천상과 지옥을 유심주의, 즉 우리가 마음먹기에 따라 좌우되는 것으로 판단했다. 때문에 현실 속에서 고뇌에 얽혀 괴로우면 지옥이고, 좋은 일에 행복하면 천상이라는 해석을 내놓게 된다. 유심주의가 흥미로운 것은 이것이 사실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인식하고 있느냐!’가 나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1시간 전에 핸드폰을 잃어버렸다고 치자. 이것을 인지하기 전까지는 아무 일 없이 마냥 행복하다. 그러나 이를 자각하는 순간 갑자기 허둥대며 일상이 지옥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사건이 발생한 것은 1시간 전인데, 내가 지옥을 체감하는 것은 사건을 인지한 바로 지금인 것이다.
현재의 판단을 존중해 언제나 긍정적으로 노력하는 행복한 삶. 이것이 동아시아 불교의 천상과 지옥에 대한 결론이다. 그리고 만일 이렇듯 열심히 노력한 사람에게 사후세계가 존재한다면, 그는 의당 천상으로 갈 것이므로 문제 될 것이 없다. 붓다는 사람이 살 때 행한 선한 행위만이, 그의 죽음을 따르는 그림자가 되어 자신을 보호한다고 가르쳤다. 즉 언젠가 놓고 가야 하는 것에 투자하는 것은 인생을 낭비하는 어리석은 행위라는 것이다.
불교의 전설에는 죽어서 구렁이가 된 주지 스님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있다. 살아서 절 살림을 너무나도 애지중지한 과보로 죽은 뒤에도 절을 지키는 구렁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내용은 다르지만, 검수지옥의 이야기와 관통되는 본질을 가졌다. 놓을 줄 모르는 쥠은 스스로에 대한 속박과 구속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즉 무엇이든 중독에는 반작용이 따르게 마련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