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이 정의당의 ‘1호 법안’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처리에 협력하기로 했다. 보수정당인 국민의힘이 원내 정당 중 가장 왼쪽에 선 정의당과 이른바 ‘정책공조’에 나서는 건 매우 이례적 일이다. 취임 후 당 정강정책에 5ㆍ18 민주화 운동 정신 계승을 못박고, 재계의 반대가 큰 ‘공정경제 3법’에 찬성 뜻을 드러냈던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의 또 다른 ‘좌클릭’ 행보란 평가가 나온다.
국민의힘은 10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중대재해 방지 및 예방을 위한 정책간담회’를 열었다. 당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원이 주최했고, 김 위원장과 주호영 원내대표 등 지도부가 참석했다. 또 강은미 정의당 원내대표와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운동본부 등 관련 노동ㆍ시민단체 관계자들도 함께 자리했다. 정의당은 지난 6월 경기 이천 물류창고 화재 같은 산업 재해가 발생했을 때, 위험 방지 의무를 다하지 않은 사업주나 경영 책임자를 형사처벌 하도록 하는 내용의 ‘중대재해 기업 및 책임자 처벌법’을 21대 국회 1호 법안으로 발의했다. 대표발의자가 강 원내대표다.
간담회가 시작되자 20대 국회의원을 지낸 지상욱 여연 원장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지 원장은 “고(故) 노회찬 의원이 중대재해기업 및 책임자 처벌법을 발의했지만, 민주당과 우리 당에서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20대 국회 임기 만료로) 자동폐기된 것으로 안다”며 “이 자리를 빌려 사과한다”고 했다. 주 원내대표도 “너무 늦었다. 판사 시절 산재 사건에 문제의식이 많았고 환노위에서도 이런 문제를 주장했는데, 입법까지 연결하지 못해 아쉬운 게 많았다”고 했다. 이에 강 의원은 “안전예산 투자 결정, 실질적 권한을 가진 경영자는 처벌이 어려운 게 산업재해가 안 주는 이유다. 기업 문화를 바꾸는 게 가장 중요하다”며 법안 통과에 협력해달라고 호소했다.
간담회 후 국민의힘 지도부는 법안 처리에 최대한 힘을 보태겠다고 했다. 주 원내대표는 기자들과 만나 “민사든 형사든 훨씬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 징벌적 손해배상도 도입해야 한다”며 “정의당이 내놓은 방향으로 제정되도록 노력하겠다. (법안을) 통째로 다 받을지, 일부 조정할지 해당 상임위에서 논의해보겠다”고 했다. 국민의힘과 정의당이 힘을 합해도 전체 의석 수 과반을 넘지 못해, 민주당이 반대하면 처리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같은 야당이면서도 이념의 양 극단으로 평가 받는 두 당이 힘을 합쳤다는 사실 자체로 민주당엔 압박이 될 수 있다. 21대 국회 회기 내 법안이 처리될 가능성이 커졌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국민의힘이 정의당과 코드를 맞추는 것은 매우 드문 모습이다. 오히려 필요할 땐 더불어민주당과 손잡고 소수정당을 따돌린 채 기득권을 지킨다는 비판에 익숙하다. 이런 변화엔 국민의힘이 ‘부자를 대변하는 정당’이란 인식을 벗어나야 한다는 김 위원장의 뜻이 강하게 반영됐다. 필요한 법안ㆍ정책이라면, 특히 약자를 위한 것이라면 좌우를 따지지 않고 추진해야 한다는 게 그의 소신이다. 이날 간담회도 김 위원장이 취임 이래 강조해 온 ‘약자와의 동행’이란 슬로건 아래 개최됐다. 사회적 약자인 산재 노동자와 유가족에 손을 내밀겠다는 취지다. 김 위원장은 “산업안전은 정파 간 대립할 문제가 아니다”며 “민주당, 국민의힘, 정의당 모두 힘을 합쳐 한마음으로 산업현장 사고에 대처할 방안을 논의하겠다”고 했다. 다만 국민의힘 내부에서 사업주에 대한 처벌이 너무 세다는 반발여론도 있는 만큼, 내부 설득 과정이 뒤따라야 할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