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부 장관이 낸 경제학 문제

입력
2020.11.10 18:00
26면

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계약갱신청구권을 행사하면 전세 공급도 줄지만, 기존 집에 사는 분들은 계속 거주하기 때문에 수요도 동시에 줄어든다.” 지난 9일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이 국회에 출석해 “최근 전세난은 세입자 계약갱신청구권을 인정한 임대차 3법 시행으로 발생했다”는 야당 의원 지적을 부인하며 근거로 내세운 ‘경제학 법칙’이다. 공급이 줄었지만, 수요도 같이 줄었으니 가격 상승 요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어떤 ‘경제학 개론’ 중간고사에 그 주장이 타당한 것인지 묻는 문제가 나왔다면 어떻게 답해야 할까.

□ 현실은 수요곡선과 공급곡선이 한두 가지 요인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가상공간’이 아니다. 더욱이 상품 특성에 따라 두 곡선의 반응 속도가 다르다. 전세 공급은 매매보다 더 단기간에 늘어나기 힘들다. 반면 결혼 직장 진학 등으로 인한 신규 수요는 꾸준히 발생한다. 특히 수도권 집중이 심각한 우리나라에서 전세 수요는 일부 지역에 집중된다. 인기 지역에서 계약 갱신청구권 덕분에 계속 살 수 있게 된 임대인이 늘어난 것이 가격 상승에 따른 공급 증가를 가로막으면서 전셋값 급등세 확산에 불을 붙였다.

□ 전셋집 공급 부족으로 인한 가격 상승이 3개월 넘게 이어지자 급기야 비인기지역 집값이 들썩이고 있다. 전세난에 지쳐 차라리 집을 사겠다는 수요가 늘면서 지난주 중저가 아파트 가격 상승률이 4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갱신청구권이 정부의 주택 투기 억제 정책으로 궁지에 몰렸던 이 지역 ‘다주택자’들의 퇴로까지 열어 준 것이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전세 매물 부족은 빠르게 전국으로 확대될 것이다.

□ 이상이 전셋집을 구하러 다니거나, 살던 집을 비워주고 낯선 동네로 이사해야 할 처지라면 누구나 쉽게 작성할 수 있는 답안이다. 그런데도 주택 정책 최고 책임자는 공허한 경제 지식을 동원해 명백한 현실을 부정했다. 이를 본 전세 난민의 분노는 폭발 직전이다. 신뢰는 정책 성공에 필수 전제 조건이다. 하지만 전세난 대책을 조만간 발표하겠다는 기사에는 “대책이 더 무섭다, 차라리 가만히 놔둬라”라는 댓글이 이어진다. 이런 불신을 풀지 못하면 아무리 훌륭한 대책도 성과를 기대하기 힘들다.

정영오 논설위원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