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념을 입고 먹고 마신다” 밀레니얼의 가치소비

입력
2020.11.11 13:00
19면
동물복지 달걀·공정무역 커피… 비싸도 구매 
"정치경제적 무력해도 소비로 세상 바꿀 것"

편집자주

이슈와 화젯거리를 이야기할 때 기성세대는 자주 핏대를 세웁니다. 그들의 목소리가 워낙 크다 보니 밀레니얼 세대는 의견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의견 표출의 기회가 없었을 뿐입니다. 한국일보 인턴기자들이 기성세대와는 다른 밀레니얼의 시각을 담아 한국 사회를 ‘언박싱’ 해보겠습니다. 밀레니얼의 솔직한 체감지수를 느껴 보세요.


젊은 세대는 저마다 관심 분야가 뚜렷합니다. 채식주의자가 되기로 결심한 친구는 육식이 아니면서도 맛있는 음식을 찾으려고 열을 올립니다. 동물권에도 관심이 생겨서 종종 유기견 보호센터에 기부도 한다네요. 다른 친구는 ‘제로 웨이스트(플라스틱 등 폐기물을 최소화하고 재활용을 권장하는 환경보호 방식)’에 동참하는 기업들의 제품을 주로 구매합니다. 다소 비싸더라도 지구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 지출은 감내한다는군요.

최근 MZ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자)를 중심으로 자신의 가치관에 맞는 제품을 선택해 소비하는 ‘가치소비’가 자리잡아가고 있습니다. 가치소비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가격이나 품질이 절대기준인 기존 소비행태와는 달리, 윤리적 신념이나 개인취향에 따라 기꺼이 지갑을 엽니다. 이른바 ‘착한 소비’라고도 불리는 이유입니다. 지난 3월 우리 농가 돕기의 일환으로 판매한 강원도 감자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중심으로 퍼져나가며 순식간에 품절된 사례가 그런 경우입니다. 환경을 생각하는 의류브랜드 ‘파타고니아’의 플리스 재킷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것도 가치소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난 8월 한국리서치 조사에 따르면, 사회적 책임을 잘하는 기업의 제품이나 친환경 제품을 구매하는 것을 사람들은 '착한 소비'라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특히 2030은 친환경 제품과 동물복지 제품을 사는 걸 착한 소비라고 답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밀레니얼 세대는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고 사회 기득권층도 아닙니다. 사회 초년생이거나 학생 신분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죠. 그런데도 가성비를 따지기보다 과감하게 가치소비를 하려는 이유는 뭘까요. 밀레니얼의 가치소비, 그 이유를 들어봤습니다.


가치관 따라 고르거나 불매한다

티나: 가치관에 따라서 구입하려는 제품을 정하는 경우가 있나. 생각보다 많은 것 같아.

분당동 갈치발(분갈): 나는 '동물복지 달걀'하고 '공정무역 커피'를 구매해. 동물권이랑 제3세계 노동착취, 빈곤문제가 심각하잖아. 그런 소비가 일상에서 도울 수 있는 방법이라고 보거든.

양꼬치엔 닭꼬치(양닭): 난 기부 팔찌를 차고 있어. 물건 가격 일부가 유기견 보호활동에 사용되는 거야. '희움'이나 '마리몬드'처럼 후원할 수 있는 방식의 팔찌를 구매한 적도 있어. 생일선물로 친환경 텀블러를 받은 적도 있고.

귀한곳에 누추한분(귀누): 나는 몇 달 전부터 샴푸 대신 비누로 바꿨어. 비누 하나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씻어. 플라스틱도 안 나오고 화학성분도 적어서 좋더라고. 그리고 노숙인 자립을 후원하는 '빅이슈'라는 잡지도 꾸준히 사고 있어.

양닭: 물건 살 때 국산제품 위주로 구매하려고 해. 얼마 전에 풋살화를 새로 샀는데 나이키나 아디다스가 아닌 국산을 샀어.

펭수야 사랑해(펭사): 나도 비슷해. 자취하다 보니 직접 요리를 많이 하거든. 가급적 국산 농산물을 구매하려고 해. 중국산 세척당근 대신 국내산 흙당근을 구매하는 식으로.

줌으로 공부중(줌공): 난 책을 많이 사는데 대형서점은 이용하지 않고, 꼭 동네서점에서만 구입해. 중고서점도 이용 안 해. 창작자를 위해선 시장에 새 책이 돌아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분갈: 요즘 채식하는 친구들도 많이 보여. 나도 동참하고 있어. 최소한 일주일에 2, 3일은 채식하는 거지. 이런 간헐적 채식도 환경에 도움이 되는 것 같아.

티나: 100배 공감해. 최근 들어 육식 자체에 대해 굉장히 죄책감이 커졌거든.

줌공: 가치관 때문에 고르는 물건도 있지만, 반대로 안 사는 것도 있을 것 같아. '가치불매'라고 해야 할까.

분갈: 오히려 불매하는 제품이 더 많아. 노동자에게 갑질한다는 기업이나 성추행 당한 여성 직원을 부당해고했다는 기업의 제품은 절대 안 사. 그리고 도덕적 논란이 있는 예술가의 작품도 소비하지 않으려고 하고.

귀누: 나는 동물가죽이나 털을 이용한 옷을 안 사거든. 패딩을 만들려고 거위 털을 뽑는 동영상을 봤는데 너무 잔인하더라고. 그래서 작년엔 비건 패딩이라고 그냥 솜으로 만든 패딩을 샀어. 조금 춥지만 옷을 더 껴입으면 되지.

양닭: 반일 분위기 탓인지 일업이랑 관련된 제품은 손이 안 가더라고. 국산이나 다른 외국산으로 대체 가능할 땐 더욱 그렇고.

귀누: 불매를 넘어 아예 소비 자체를 줄인 것도 있어. 난 캡슐커피랑 배달음식을 많이 줄였어. 플라스틱이 너무 많이 나와서 보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 받거든. 차라리 안 먹는 게 답이라고 생각했어.


소비는 가장 쉬운 의사표현 방법

양닭: 소비 만능시대에, '가치소비'라는 문화가 함께 유행하니까 흥미롭기도 해.

분갈: 자본주의 사회에서 영향력을 드러내는 최고의 방법이 돈이잖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기업의 행동을 바꾸기 위해선 소비가 최선의 방법인 거지. 최근 SNS를 보면 소비를 통해 사회를 바꾸려는 움직임이 더 거세진 것 같아.

티나: 맞아. '돈을 어디에 쓰느냐' 자체가 개인이 의사표현을 할 수 있는 최고의 권리 같아. 그래서 적은 돈이라도 의미 있는 곳에 쓰려고 노력하는 거고. 내 돈을 어디에 쓸지는 전적으로 내 결정이니까.

귀누: 평소에 정치나 경제 영역에서 밀레니얼이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잖아. 그래서 소비를 통해 내 신념을 드러내는 것 같아. 정당에 가입한다고 당장 뭔가를 바꾸기는 쉽지 않잖아. 그러니까 소비를 통해서라도 변화에 일조하겠단 생각이지.

줌공: 2030 특유의 감수성도 좋은 쪽으로 소비를 활성화시킨 것 같아. “나 하나로 바뀌겠어”라는 생각이 기성세대 인식이라면, 지금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건 나 자신이니까, 변화를 위해선 나부터 시작해야 한다”라는 인식이 굉장히 강해진 것 같아.

귀누: 동감해. 소비할 때 여전히 '가성비'는 중요하지만, 변화의 조짐이 보여. 물건 하나를 고를 때도 더 싼 걸 사려고 쇼핑하고 비교하는 행태에 사람들이 질린 것 같기도 해. 이젠 좀더 ‘나’를 중심으로 소비하는데 집중하자는 거지.

양닭: 기술발전과 소득향상도 영향을 줬다고 생각해. 과거엔 물질적으로 지금보다 덜 풍요로웠으니까 가성비가 절대적 기준이었잖아. 새로운 물건이 나오면 그 자체로 놀라움의 대상이 됐고. 그런데 요즘엔 질적인 차이가 별로 없는 여러 회사의 제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잖아. 제품의 외적 차이가 거의 없으니, 내적인 부분에 좀더 가치를 두는 건 아닐까.

줌공: 맞아. 예전엔 필수품을 사는 게 소비였다면, 이제 필수품은 어느 정도 갖춰져 있잖아. 같은 소비를 해도 얼마나 차별화할 지가 중요해진 셈이지.

펭사: SNS 영향도 큰 것 같아. 착한 소비를 남들에게 알리고, 불특정 다수가 거기에 참여하면서 가치소비가 더 쉽게 퍼져나가잖아. 물건을 사서 SNS에 올리는 작은 행위만으로도 변화를 이끌 수 있다는 심리가 이런 현상을 부추기는 것 같아.

귀누: SNS뿐 아니라 인터넷 커뮤니티 같은 곳에서도 사회적 기업이나 자영업자에게 ‘돈쭐낸다(돈으로 혼쭐낸다)’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거든. '가치소비'라는 말이 이제는 문화로 자리잡은 것 같아.


가치소비는 유익하기만 한 걸까

귀누: 가치소비를 한다는 사람들도 불만은 있어. 일단 너무 비싸다는 거야. 내 주변에 반려인들이나 비건처럼 가치소비를 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불만은 비싸도 너무 비싸다는 거야. 대량생산 제품이 아니니까 어느 정도 이해하지만, 어떤 제품은 기성 제품과 크게 다르지도 않은데 가격은 천양지차라는 거야. 좋은 일 하려고 돈 쓰는 사람들을 일부러 겨냥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야.

양닭: 티셔츠에 고가 브랜드만 새기면 비싸지는 거랑 비슷해 보여. 원래 있던 제품에 라벨만 붙여서 새로운 것처럼 선보이기도 하거든. 일반제품이 질적인 변화 없이 갑자기 친환경 제품이 되는 거지. 이런 일이 반복되면 본래 취지가 희석될 거야.

분갈: 난 물건을 구매하는 행위가 가끔 피곤해질 때가 있어. 얼마 전에 대형마트에 갔는데 마트에서 일어난 갑질 때문에 직원들이 시위하고 있더라고. 그 순간 내가 이곳을 이용해도 되나 싶었어. 한편으론 '왜 이런 죄책감을 소비자가 느껴야 할까' 생각했어. 기업이 바뀌면 되는데 말야.

펭사: 작년에 일본제품 불매운동이 있었잖아. 불매운동에는 동의했지만, 동참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강요해선 안 된다고 생각해. 그런데 강요 아닌 강요가 너무 많았어. 인스타그램에 공부하는 모습을 올릴 때 일제 필기구나 공책을 사용하면 악플이 달리더라고. 가치소비를 빙자해서 타인을 비방하고 강요하는 모습이 만연했지.

귀누: 가치소비도 때로는 대량소비를 부추기는 것 같아. 환경보호 마케팅을 하는 '파타고니아'가 착한 기업으로 꼽히면서 '플리스 재킷'이 유행하고 있잖아. 이제는 거의 모든 패션 브랜드에서 플리스 재킷을 내놓고 있어. 그런데 사람들이 엄청나게 구매하는 걸 보고 있자니, 이런 소비가 과연 환경보호라는 본래 취지에 맞는지 회의가 들었어.

분갈: 텀블러도 마찬가지야. 플라스틱 컵을 이용하지 말자고 나온 건데, 유명 브랜드 텀블러를 수집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텀블러 소비의 본래 가치가 많이 퇴색됐어.

귀누: 에코백도 그래. 난 사은품으로 받은 에코백만 다섯 개 있는데 전부 처치 곤란이야.

양닭: 결국 무언가를 너무 많이 사버리면 일반적인 소비와 다를 게 없어. 취지와는 다른 행위가 돼버리니까.

그럼 어떤 소비가 좋은 소비일까

양닭: 부정적인 면도 있지만 가치소비는 그래도 올바른 방향의 소비라고 생각해. 소비자들이 원하니까 기업도 동참하는 거고, 결국 사회 전반으로 확산될 수 있잖아. 최근 주목받는 투자지표 중 하나가 'ESG(기업이 직원·고객·환경 등에 얼마나 기여하는지, 지배구조는 얼마나 투명한지 평가하는 것)'인데, 실제로 기업들이 가치소비를 고려해 여러 사업을 진행하고 있어. 텀블러에 음료를 담으면 할인해주고 종이빨대를 사용하고.

분갈: 나에게 가치소비는 정체성을 강화하는 일이기도 해. 입는 옷부터 마시는 것까지 내 가치관에 따라 맞췄을 때 생기는 만족감이 있거든. 소비를 통해 나 자신을 드러내면서, 은근히 주변에 내가 하는 일에 동참하라고 권유하기도 하고.

귀누: 그런데 장기적으로 봤을 때 이런 모습이 유행으로만 그치면 안 될 거 같아. 보다 올바른 소비문화로 자리 잡아야 하지 않을까. 소비로 가치를 드러내고, 기업은 그에 맞추어 바꿔 나가고. 그랬을 때 소비의 진정한 의미를 살릴 수 있지 않을까.

양닭: 그래. 선순환을 도모하는 거지. 가령 환경오염을 조장하는 일반 샴푸 대신에 친환경 제품을 찾아 쓴다면, 일반 샴푸만 만들어온 기업도 친환경 샴푸를 만들 수 있는 거지.

분갈: 한편으론 소비만 하는 건 소극적 의사표시 같아. 문제가 있으면 민원도 넣으면서 소비자 권리를 더 내세워야 빠른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

귀누: 사실 가치소비를 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을 수 있어. 왜냐하면 그걸 추구하는 사람만 SNS에 올리잖아. 유행하고 있다지만, 더 대중화될 필요가 있어.

티나: 가치소비가 자리잡으려면 상상력도 중요하다고 생각해. 당장 내가 편한 걸 구매하는 것보다, 내가 이 제품을 샀을 때 다른 공간과 다른 시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해 보는 거지. 소비 이전에 그런 상상을 해보는 게 보편화된다면 가치소비 문화를 더 빠르게 전파할 수 있을 것 같아.

줌공: 나는 매일 편의점 카페라테를 마시면서도 플라스틱 배출에 별 관심이 없었어. 얼마 전에 정세랑 작가의 ‘목소리를 드릴게요’를 읽었는데, 23세기 사람들이 21세기 사람들을 역겨워할까 두렵다는 말이 있더라고. 이렇게 플라스틱을 배출하고 기후위기를 방치한다면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날 것 같아. 지금의 가치소비는 그런 일을 방지하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계기가 될 것 같아. 지금까지 이런저런 이유로 실천을 못 했는데 앞으론 동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정리=김단비 인턴기자

참여=노지운, 왕나경, 이인서, 장수현, 장채원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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