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대선] 끝까지 민주주의 흔드는 트럼프... '복제 트럼프' 등장 우려

입력
2020.11.07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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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대선 혼란에 "민주 가치 무너졌다" 탄식
포퓰리즘 지도자들에 잘못된 메시지 우려

수십년간 백악관의 주인은 세계 민주주의 지형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비록 트럼프 2기의 출범은 희미해졌지만,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끝까지 대의 민주주의를 뒤흔드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보며 지구촌은 ‘복제 트럼프’의 출현을 경계하고 있다.

미 일간 워싱턴포스트(WP)는 5일(현지시간) “전 세계가 미 대선의 ‘클리프행어(cliffhangerㆍ흥미를 끌기 위해 마지막에 배치하는 아슬아슬한 극적 장치)’에 사로잡혀 민주주의 운명의 향방을 두려워하며 지켜보고 있다”고 전했다. 미시간, 위스콘신, 조지아 등 경합주(州)에서 역전을 거듭하는 개표 현황과 트럼프 대통령의 부정 투표 주장이 뒤섞여 극도의 혼란에 빠졌다는 것이다.

안네그레트 크램프 카렌바우어 독일 국방장관은 전날 독일 공영방송 ZDF에 “매우 폭발적인 상황”이라며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의 헌법적 위기를 촉발할 위험을 무릅쓰는 것에 깊이 걱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영국 싱크탱크 채텀하우스도 “미국의 이미지가 무너지고 있다. 환상이 뚫렸다”고 혹평했다. 중국 매체들 역시 대선 국면에서 미국사회의 분열상을 집중 조명했다. 공산당 기관지 환구시보는 6일 트럼프 캠프의 선거 소송을 ‘투표 과정 오명’으로 묘사했으며, 관영 글로벌타임스는 전날 “후보간 논쟁과 혼란, 선거 결과 불복 등은 정치적 여건이 불안정한 개발도상국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라고 비판했다.

세계 최강국 수장이 직접 민주적 절차를 훼손하는 사태에 전 지구적인 반발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2020년 미 대선을 참관한 국제선거감시단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39개국 대표자 102명은 이날 성명을 내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으로 물류 측면에서 어려움이 많았지만 선거는 잘 관리됐다”고 밝혔다. 투표 과정에서 사기 행위가 있었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을 정면 반박한 것이다. 대선 이튿날인 4일 영국 런던과 독일 베를린 등 유럽 주재 미 대사관 앞에서는 “모든 표를 집계하라”는 시위가 열리기도 했다.

트럼프의 선거 불복 사태가 지구촌에 미치는 영향은 자명하다. 미 시사월간 애틀랜틱은 “올해 대선은 ‘트럼피즘(트럼프주의)’에 대한 국민적 심판보다 전 세계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의 생존 가능성을 묻는 시험대였다”며 “선거 결과는 글로벌 보건 위기 속에서도 포퓰리즘은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해석했다. 민주주의 원칙을 허무는 유일 강대국 대통령의 기행에 다른 포퓰리즘 지도자들이 고무될 수 있다는 의미다. 실제 자이르 보우소나루 브라질 대통령의 아들이자 정권 실세인 에두아르두 보우소나루 하원 외교ㆍ국방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의 부정 선거 주장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공유하며 “미 대선에서 나타난 이상한 일이 2022년 브라질 대선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우파 성향의 야네스 얀샤 슬로베니아 총리도 4일 개표 도중 “미국민이 ‘4년 더’를 바라며 트럼프 대통령과 마이크 펜스 부통령을 뽑은 것은 매우 분명해 보인다”고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가 거센 비난을 받았다.

올해 특히 보건 위기 극복을 이유로 민주적 가치의 손상을 묵인하는 경향이 두드러진 점도 우려를 더한다. WP는 “코로나19 여파로 많은 나라에서 선거가 미뤄졌는데, 권위주의 정권은 방역을 빌미로 중앙집권적 통치 행태를 더욱 확고히 했다”고 진단했다. 올 들어 총선, 대선 등 국가 단위 선거가 연기된 나라는 47개국이 넘는다. 미 국제인권단체 프리덤하우스는 “지금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세계 곳곳에서 자유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의 신념과 해외 민주주의 운명을 좌우할 것”이라고 전했다.

장채원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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