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해질녘 물가에서 만난 수크령

입력
2020.11.03 14:00
25면


유난히 파란 하늘이 이어지는 가을입니다. 혹시 산천이 너무 메마를까 아주 가끔 내리는 빗방울도 반갑지만, 그래도 매일 이 아름다운 하늘과 부드러운 햇살과 아침 저녁으로 느껴지는 차가운 기운의 상쾌함에 감사하며 늦가을의 정취를 만끽합니다.

가을은 얼마나 무궁한지 매번 가을마다 제 마음을 쿵하고 내려놓을 만큼 사로잡는 풍광이 달라집니다. 단풍빛이기도 하고,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이기도 하며, 산야에 흐드러진 국화과 식물들의 향기이기도 하지요. 단풍빛이라도 어느 해엔 복자기나무의 맑은 빨간색이, 또 어느 해엔 싸리 잎의 점점이 박히는 노란 빛이 가는 곳마다 마음을 흔들기도 합니다. 때론 느티나무마다 다 다르게 맞이하는 가을 단풍빛 구경에 바쁘기도 합니다.



올 가을엔 유난히 벼과식물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제가 매일 떠나는 수목원 산책길, 심어진 지 얼마되지 않은 나무들이 제대로 뿌리를 내리고 잎을 펼쳐내는 기다림의 시간동안 청류지원 실개천의 수크령이, 습지생태원의 물억새 무리가, 축제마당에 사람들 추억의 사진을 담아주는 팜파스글래스가 이 가을의 서정을 담당합니다. 며칠 후에 가볼 순천만의 갈대 군락은 또 얼마나 멋질까요! 모두 화려한 꽃들을 가지지 않은 벼과식물들입니다. 물론 이들도 꽃이 피지만 화려한 꽃잎을 가지지 않은 탓에 꽃이 피었을 때에는 눈길을 잡지 못하다가 꽃은 이미 지고 열매가 익어가면 비산을 위한 털들이 부풀어 올랐을 때 사람들은 억새가, 갈대가 피었다며 비로소 그들을 만나기 위한 길을 떠납니다.



여러 벼과식물이 있지만 그 가운데 수크령은 언제나 만날 수 있는 식물이어서인지 제겐 특별하진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도시의 가운데 물길을 새로 만들어 흙을 돋우어 한 그루 한 포기씩 식물을 키워가는 힘겨운 상황이 되고 보니, 어디든 어떤 조건이든 잘 견뎌내는 강건한 수크령이 가장 먼저 안착하여 이 가을, 물안개 피는 아침부터, 햇살에 반짝이는 오후, 노을 지는 저녁까지 은은하지만 다채로운 빛깔로, 시시각각 마음을 사로잡네요. 수크령은 그령이라고 부르는 벼과식물과 비교해서 훨씬 강하고 억세다고 하여 남성그령이라는 뜻으로 수크령이 되었다고 합니다. ‘길갱이’라는 우리말 이름도 있다고 하는데 주로 길가에 많아서 그리 불렀겠죠?



사실 수크령이 정원 또는 조경의 중요한 소재로서 인기를 얻기 시작한 것은 꽤 되었습니다. 늦여름부터 꽃이삭을 피워내기 시작하여 가을에 부풀고, 겨울이 되어 다 마르고 서리가 앉도록 우리곁에 있습니다. 개체에 따라 붉은빛부터 연한 노란색, 연한 연두색까지 색의 변이도 다채롭고 무엇보다 잘 자라니 좋은 소재이지요. 수크령의 인기는 식물의 아름다움을 보는 기준이 매우 다양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어 참 반갑습니다.



석양이 질 무렵이면 수목원 산책길에 이어지던 연인들의 발걸음과 축제 마당에 맴돌던 아이들의 재잘거림마저 사라지고, 화려한 꽃이 피지 않아 잡초처럼 무시당하던 우리의 수크령은 바람에 몸을 맡겨 흔들리며, 세상의 기준은 바뀌고, 유연하여 더 강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며 쓸쓸하지만 기품 있게 그렇게 서서히 계절을 마무리합니다.

저도 세상의 귀함과 아름다움의 기준들은 절대로 절대적이지 않다고, 그 소중한 가치들을 정성껏 찾아 만나며 그렇게 살아가겠노라고 다짐하는 오늘 수목원 산책길을 마무리합니다.

이유미 국립세종수목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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