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올해는 코로나19 팬데믹이 우리 인류의 삶을 완전히 뒤흔든 해로 기록될 것이다. 팬데믹은 현재진행형이다. 지구적 차원에서 사망자가 100만 명을 이미 넘어섰다. 백신 개발이 임박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 보급 조건을 고려할 때, 팬데믹은 내년에도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 이 코로나19 팬데믹이 인류에게 안겨주는 제1의 교훈은 생태학이 이제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 사실일 것이다.
생태학은 본래 생물들이 서로 환경을 형성하고 결합하면서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다루는 생물학의 한 분야로 출발했다. 이후 생태학은 자연과학을 넘어 인문ㆍ사회과학에도 큰 영향을 미쳐 왔다.
인문ㆍ사회과학에서 생태학의 패러다임은 ‘심층생태학’, ‘사회생태학’, ‘정치생태학’으로 분화되면서 발전해 왔다. 심층생태학이 생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사유 방식의 근본적 전환을 역설한다면, 사회생태학은 의식 변화와 제도 개선을 동시에 강조한다. 한편 정치생태학은 자본주의 생산 및 소비체제의 개혁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철학자 아르네 네스, 생태학자 머레이 북친, 사회학자 앙드레 고르가 심층생태학, 사회생태학, 정치생태학을 각각 대표해 왔다.
1990년대 이후 이러한 생태학의 사유에 큰 영향을 미친 저작이 스웨덴 출신의 언어학자이자 작가이며 사회운동가인 헬레나 노르베리-호지가 1992년 내놓은 ‘오래된 미래: 라다크로부터 배우다’다.
‘오래된 미래’가 심오한 이론적 저작은 아니다. 그러나 이 책에 담긴 메시지는 인류 삶의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안겨준다. 이 저작은 노르베리-호지가 학위 논문을 쓰기 위해 방문한 북인도의 라다크에서 발견하고 관찰하며 실천해 온 것들을 기록한 것이다. 라다크의 전통, 변화, 미래가 그 구체적인 내용을 이룬다. ‘프롤로그’에서 노르베리-호지는 말한다.
“과거에는 더 나빴던가? 아니면 더 좋았던가? 티베트 고원 위의 오래된 문화의 지방 라다크에서 얻은 16년 이상의 경험이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을 극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나는 우리의 산업문화를 전혀 다른 관점에서 보게 됐다.”
노르베리-호지가 라다크에 도착해 발견한 것은 건강하고 평화로운 공동체 생활과 문화였다. 라다크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빈곤하지 않고 정신적으로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 그런데 라다크에 불어닥친 서구식 개발은 이러한 공동체를 파괴해 라다크를 경쟁과 소외의 사회로 바꾸어 버렸다. 라다크 사람들은 스스로 가난하다고 생각하고 돈을 중시할 뿐만 아니라 타인에 대한 친밀감과 배려도 잃어버리게 됐다.
‘오래된 미래’의 후반부는 이러한 라다크의 변화에 맞선 대안적 실천들을 다뤘다. 노르베리-호지가 제시하는 ‘반개발(counter-development)’은 그 핵심 개념이다. 반개발이란 기존의 개발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것은 근대 산업적 생산방식이 치러야 하는 대가를 폭로하고, 그 대신 자연과 공존하고 타인과 연대할 수 있는 지속가능한 발전을 모색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이 길지 않은 책이 많은 이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킨 까닭은 서구화ㆍ발전ㆍ문명에 대해 노르베리-호지가 던진 근본적인 질문에 있었다. 인간에게 행복한 삶이란 어떤 걸까. 물질적으로 빈곤하더라도 인간과 자연의 공존, 인간과 인간의 연대가 존재하는 삶이 더 행복한 것은 아닐까. ‘오래된 미래’는 생태학적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지속가능한 삶과 발전을 추구했다.
노르베리-호지의 생태 사상을 좀 더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책이 국제생태문화협회(ISEC)가 1992년 펴낸 ‘진보의 미래’다. 이 저작에서 노르베리-호지와 생태학자 피터 고어링은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를 유지하기 위해선 지구의 자원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대안적인 발전 모델과 생활 양식을 마련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생태 위기는 극복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생태친화적인 기술 개발과 다양한 지역 문화의 보존은 이러한 위기에 맞서는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게 두 사람의 결론이었다.
지난 20세기 후반 이후 생태학적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그 대안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선 의문이 작지 않았다. 생태학적 대안은 실현불가능한 유토피아에 머물러 있다는 게 그 핵심이었다. 이러한 와중에 코로나19 팬데믹은 생태학의 의미를 새삼 일깨워주고 있다.
팬데믹은 예견된 사태다. 코로나19는 자연 파괴의 진행 과정에서 동물과 인간의 접촉이 증가해 발생한 인수공통감염병이다. 생물학자 최재천은 “예전 같으면 에피데믹(국지적 유행) 수준으로 끝났을 일을 사람이 팬데믹으로 만드는 거다”라고 비판했다.
생태학적 관점에서 코로나19 팬데믹의 원인을 분명히 밝힌 이는 미래학자 제러미 리프킨이다. 리프킨은 저널리스트 안희경이 펴낸 ‘오늘부터의 세계’에서 이 팬데믹이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고 말한다. 리프킨은 팬데믹의 원인을 기후변화에서 구한다. 그에 따르면, 기후변화는 물순환 교란으로 인한 생태계 붕괴, 인간의 야생지역 침범, 야생동물의 이주라는 결과를 낳는다. 서식지가 파괴된 동물의 몸을 타고 바이러스가 이주하고, 바이러스는 다시 인간의 몸을 타고 교통수단을 통해 전 세계로 확산된다는 것이다.
우리 인류가 현재 서 있는 자리를 리프킨은 화석연료 중심의 2차 산업혁명이 가져온 결과로 분석한다. 그에 따르면, 석유와 내부연소 엔진에 기반을 둔 이 화석연료 문명은 지구 온난화, 생태계 파괴, 대규모 감염병을 낳았다. 리프킨은 인터넷, 재생 에너지, 전기 및 연료전지 차량 등의 새로운 변화를 주목하고, 이에 기반한 3차 산업혁명의 물결을 새로운 미래로 제시한다. 이러한 3차 산업혁명의 전망에 대한 동의 여부를 떠나 지구 생태 환경에 대한 리프킨의 분석이 설득력을 갖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2020년대에 생태학의 미래는 그렇다면 어떻게 볼 수 있을까. 두 가지를 주목하고 싶다. 첫째, 앞서 강조했듯, 생태학은 이제 자유로운 선택 사항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 항목이다. 환경 파괴의 계몽과 자연과의 공존이라는 실천의 근본적 처방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인류는 주기적 바이러스 폭풍을 피해가기 어렵다. 따라서 자연을 파괴함으로써 무한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삶의 태도에 대한 엄정한 성찰이 요구된다.
둘째, 이러한 자연과 사회와 문명에 대한 생태학적 대안들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의학을 위시한 과학 분야에 대한 관심과 투자 제고, 환경 보호에 위한 일상적 실천과 제도적 방안 구현, 개인과 개인의 연대 및 개인과 공동체의 공존을 위한 새로운 문화와 세계관 모색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자연과 공존할 수 있는 인류의 미래는 어디서 찾을 수 있는 걸까. 노르베리-호지가 상상하듯, 그러한 소망은 라다크가 보여준 것처럼 아주 오래된 우리 인류의 경험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코로나19 팬데믹은 새삼 ‘오래된 미래로서의 생태학’을 소환하고 그 의의를 환기시키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서 생태학적 계몽에 대해선 사상가 장일순, 환경운동가 최열, 정치학자 문순홍, 생물학자 최재천, 그리고 특히 생태학자 김종철의 기여가 컸다. 김종철은 한편으로 ‘녹색평론’을 펴내 생태학의 시민적 관심을 촉구하고, 다른 한편으론 한국적 생태학의 사상적 토대를 구축하고자 했다.
생태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두 가지가 중요하다. 첫째, 기후위기 대책을 포함해 지구 환경을 보호하려는 제도적 실천이 이뤄져야 한다. 환경파괴적 산업구조와 기술체계가 유지되는 한, 환경 보호를 위한 노력은 결국 미봉책에 머물고 만다. 지구 환경이 처한 현실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정책들을 추진해야 한다.
둘째, 환경을 대하는 태도 및 사고방식의 변화가 이뤄져야 한다. 인간과 자연을 분리시키고 자연을 인간의 욕구 충족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한, 생태위기는 해결될 수 없다. 자연과 인간이 하나의 생물권을 이루는 동등한 존재라는 인류의 생태학적 자기계몽이 중요한 이유다.
이 지구의 진정한 주인은 누구인가. 그 주인은 모든 존재를 자신의 식구로 넉넉히 품어 안은 지구 그 자체이자 전체다. 환경을 보호하고 생명을 존중하는 생태학은 낭만적 충동이 아니라 축복받은 행성 지구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필요조건이다. 2020년대 우리 사회의 미래에서 이러한 생태학적 상상력과 성찰이 매우 중요한 사상적 가치의 하나가 돼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