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핏파이어가 없었다면 영국은 몇 달 못 버텼을 것이고, 허리케인이 없었다면 단 몇 주 만에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영국 수상 처칠이 했다는 저 말은, 나치와의 본토 항공전에서 영국을 구한 두 전투기에 대한 찬사였다. 물론 방점은 영국 호커 시들리사의 1인승 전투기 호커 허리케인에 있었다. 기동성과 전투력은 스핏파이어가 나았지만, 허리케인은 구조가 단순해 대량 생산이 가능했고 기체 뒷부분이 목재 뼈대에 방수천을 댄 형태여서 적의 기총소사에도 비교적 잘 버텼다. 즉 파일럿 생존율이 월등했다. 영국 공군(RAF)은 충분한 스핏파이어를 확보하기 전까지 허리케인에 의존해야 했고, 그걸 가능하게 했던 게 허리케인의 대량 공급을 책임진 캐나다 항공제작사 캔커(Cancar)사였다. 더 엄밀히 말하면 급박한 전시 상황에 맞춰 허리케인 설계를 변경해 대량 생산 시스템을 갖춘 캔커사의 수석항공엔지니어 엘시 맥길(Elizabeth 'Elsie' MacGill, 1905.3.27~1980.11.4) 덕이었다.
변호사 아버지와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최초의 여성 판사 어머니의 막내딸로 태어난 맥길은 1927년 토론토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미시간대에서 항공공학 석사, MIT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각각 캐나다 최초, 북미 최초 여성 공학 학위였다. 캔커사의 수석엔지니어가 된 것도 여성으로선 처음이었다. 전쟁 전 그는 복엽훈련기 '메이플 립 트레이너 2'를 설계해 멕시코에 납품했고, 첫 시험 비행에 동승했다. 그는 대학 시절 앓은 소아마비로 인한 하반신 장애인이었다.
2차대전이 발발하면서 캔커사는 허리케인 대량 생산 총력 체제에 돌입했고, 그는 1943년 중반까지 1,400여 대라는 기적적인 생산량을 달성하며 전쟁에, 그의 표현으로는 평화에 기여했다. 러시아 등 극한지 기동을 위해 설계를 고쳐 제빙 및 설상 착륙 장비를 장착한 것도 그였다.
1942년 캐나다 '트루 코믹스'라는 만화 잡지는 그를 '허리케인의 여왕(Queen of Hurricane)'이라 소개했다. 전후 그는 항공 자문회사를 운영했고, 여성 인권운동가로도 활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