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악, 더러워. 이게 뭐야."
24일 오후 2시 등산복 차림의 김난새(28)씨가 강원 강릉시의 괘방산을 오르던 중 자기도 모르게 내뱉은 말입니다. 누군가가 버린 녹차 티백과 물이 들어있는 플라스틱 물병이 나뒹굴고 있었기 때문이죠. 심지어 버린지 오래된 건지 물 색깔은 검은색으로 갈변돼 있었습니다. 김씨는 바로 친환경 쓰레기 보관용 에코색을 꺼내 물병을 집어 넣었습니다.
24일 2030 청년 10명이 강원 강릉시 괘방산 입구에 모였습니다. 산에서 '플로깅(plogging)'을 하기 위해서죠. 전 세계로 확산 중인 스웨덴의 환경운동 '플로깅'은 이삭을 줍는다는 뜻의 스웨덴어(Plocka Upp)에 조깅(Jogging)을 합쳐서 만든 말입니다. 한국에서는 쉽게 '줍깅'이라고 하기도 하죠.
이번 행사는 '리트릿 오롯이, 나'라는 체험 프로그램을 통해 진행됐습니다. 리트릿(retreat)은 바쁜 일상에서 한 발 벗어나 내면을 수련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데요.
이번 행사를 주최한 한귀리(38) '위크엔더스' 대표는 "원래는 요가와 서핑 등의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후 등산에 대한 2030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산행 프로그램을 처음 마련했다"고 전했습니다. 함께 행사를 연 염승식(39) 대표는 "또 이곳을 찾는 많은 분들이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아 자연스럽게 '클린산행'을 주최하게 됐다"고 덧붙였습니다.
플로깅은 2016년 스웨덴에서 시작돼 북유럽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했습니다. 프랑스에는 플로깅 마라톤 대회가 있고 일본에서는 스포츠와 고미(ごみㆍ쓰레기)의 합성어인 '스포고미(Spogomi)'라는 쓰레기 수거대회를 매년 엽니다. 제한된 시간 안에 정해진 구역에서 누가 얼마나 쓰레기를 많이 줍느냐로 승부를 가리는 대회입니다. 일본은 내년으로 1년 연기된 2020년 도쿄 올림픽에 이 운동을 비공식 종목으로 채택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여기에 산악 지형이 많은 지리적 특성이 반영된 듯합니다. 단순히 평지를 뛰어다니며 쓰레기를 줍기보다는 산 속에서 숨쉬면서 코로나19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고 환경도 챙기려는 겁니다.
참가자들은 쓰레기를 담을 에코색과 장갑까지 끼고 한발짝 씩 앞으로 내딛었습니다. 처음에는 당황했습니다. 생각보다 쓰레기가 나오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500m 정도 걸었을까, 먹고 버린 사탕 껍질이 이곳저곳에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담배꽁초, 귤 껍질, 물티슈, 마스크 등 다양한 쓰레기들이 군데군데 숨어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대부분 등산객들이 쓰레기를 등산로 바깥으로 버린 탓에 나뭇가지 등을 치워내며 버려야했죠.
그런데 등산을 하다보니 빨강ㆍ노랑 등 리본 모양의 플라스틱 표식이 나뭇가지에 달려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이 형형색색의 산행 리본은 원래는 복잡한 산속에서길잡이 역할을 해주지만 최근 들어서는 산악회 홍보용으로 변질됐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실제로 어떤 나무에서는 보는 이의 눈살을 찌푸러지게 할 정도로 많은 리본이 달리기도 했습니다. 일명 '플라스틱 트리'로, 등산로에서 산행 리본이 주렁주렁 매달린 나무를 가리킵니다.
에세이집 '아무튼산'의 작가이자 전직 산악 전문 기자인 장보영(35)씨는 "해외의 산에서는 이런 플라스틱 트리를 보기 힘들다"며 "우리나라에서는 산신제와 같은 기복신앙과 산에서 음식을 나눠 먹는 산악회 문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말했습니다. 장씨는 "산행 리본은 이정표의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리본을 이렇게 많이 달면 나중에 나무의 성장을 방해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최근 클린산행 또는 에코산행이 국내서 인기를 얻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는 "외국의 경우 자연에서 쓰레기를 줍는 걸 습관으로 한다. 'BPL(BackPackingLightㆍ최대한 가방은 가볍게 싸기)', 'LNT(LeaveNoTraceㆍ머문 자리에 쓰레기를 남기지 않는 것)' 같은 개념도 외국에서 왔다"며 "쓰레기를 줍는 활동은 우리나라에서는 아직은 이벤트성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괘방산은 높이 345m밖에 되지 않은 산이지만 이날은 쓰레기를 주우며 오르내린 탓에 왕복 4시간이 걸렸습니다. 등산 시작 시 '쓰레기가 없으면 어쩌지'라는 생각은 기우였습니다. 이날 챙겨간 에코색 하나에 쓰레기가 가득 차다 못해 넘쳐서 지퍼를 닫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도전'일 수도 있는 등산, 여기에 환경까지 챙기니 내 몸도 자연도 아끼는 일석이조의 체험이라고 참가자들은 입을 모았습니다. "등산도 '줍깅'도 다 도전이었다"는 정은지(37)씨는 "고생하는 게 싫어서 처음에는 하기 싫었는데 하고 나니 이전의 나를 이겨낸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등산 트라우마'를 이기고자 행사에 참여했던 김미현(39)씨는 "리본을 매놓는 것을 보고 여러 생각을 했다"며 "누군가에게는 도움을 줄 수도 있는, 선의로 한 행동이 자연에게는 아픔을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전했습니다. 이어 "내 몸과 마음을 위해 자연 안으로 들어가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연을 아프게는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고 덧붙였습니다.
박지은(28)씨는 "단순히 산을 오르내리는 활동에서 멈추지 않고 쓰레기를 주워오니 '자연과 내가 함께 살아가고 있다', '서로 도움이 될 수 있겠다'라는 보람을 느꼈다"고 얘기했습니다.
5060세대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등산 문화에 2030세대가 뛰어든 상황에서 환경까지 챙기려는 이들의 움직임.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힙'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