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네를 너무너무 타고 싶은데… 이 놀이터엔 없어요. 밤 되면 고등학생 오빠들이 와서 담배도 피워요. 진짜 무서워요. 할아버지들은 술 드시면서 욕도 하시고•••.” -서울 은평구에 사는 김모(9)양
“여기서 하면 위험하다고 안 된대요. 경찰 아저씨들도 왔었어요. 놀이터에서 공놀이하지 말라고요.” –중구에 사는 송모(9)양
아이들에겐 ‘놀 곳’이 없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9개월째, 친구도 학교도 운동장도 잃어버린 아이들은 놀이터에서마저 주인 자리를 빼앗겼다. 경로당이 문을 닫자 갈 곳 없어진 노인들, 점심 먹고 카페 들어가기 꺼림칙한 직장인, PC방ᆞ노래방을 못 가는 청소년들까지 놀이터로 몰린 탓이다. 은평구 주민 이모(40)씨는 “놀이터에서 침 뱉고 술 마시는 어른들이 버티고 있는데 어떻게 아이 혼자 보내겠냐”고 되물었다.
바이러스의 확산은 놀이터를 더 이상 ‘어린이만의 공간’으로 놔두지 않았다. 동네마다 ‘오픈 스페이스(Open space・놀이터, 유원지, 공원 등의 실외체육공간)’가 부족하다 보니 노인과 어린이, 청소년들이 놀이터에서 ‘제로섬 게임’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은평구에 사는 학부모 이모(40)씨는 “코로나로 학교에 못 가는 중고생들이 10세 미만 아이들 노는 놀이터로 몰려와 자전거로 쌩쌩 달리는 걸 보면 불안해서 눈을 뗄 수가 없다”고 토로했다. 밤이 되면 술집 대신 놀이터에 모여 술판을 벌이는 경우도 허다하지만 제재할 방법조차 없다. 놀이터에서의 음주 행위를 단속할 수 있는 법령이 없기 때문이다.
경로당 대신 놀이터에 와 앉은 노인들이 ‘다른 데 가서 놀라’며 아이들을 쫓아내기도 한다. 그 때문에 부모들은 고민이 깊다. 광진구에 사는 고모(40)씨는 “키즈 카페라도 가고 싶지만 코로나 때문에 그마저도 불안해서 못 간다”며 한숨지었다. 그는 또, “궁여지책으로 옥상에 미끄럼틀을 설치해 봤지만, 아이가 몸을 충분히 움직이지 못하니까 부쩍 투정이 늘어 고민”이라고 말했다.
학부모들의 지적에 놀이터 바깥으로 내몰린 청소년들은 차가 쌩쌩 오가는 도로변에서 자전거와 킥보드를 탄다. 이날 자전거를 몰고 나온 김모(12)군은 “탈 곳이 하도 없으니까, 도로에서 타다가 사고날뻔 한 적이 많았다”며 “마음 놓고 자전거를 탈 수 있는 공간이 하나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며 울상을 지었다.
놀이터의 입지나 시설 등의 문제도 심각하다. 한국일보 뷰엔(view&)팀이 서울 및 경기 지역 놀이터 30여곳의 ‘놀이환경’을 점검해 보니, ▶차도 또는 숙박시설과 인접한 경우 ▶아이들이 원하는 놀이기구가 없는 경우 ▶놀이터 자체가 부족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 때문에 아이들은 놀이터에서조차 마음껏 뒹굴고, 떠들고, 내달리지 못한다.
“이 주변이 다 주차장이라 애들이 맘 놓고 자전거나 킥보드 탈 공간이 없거든요? 그런데, 여길 밀고 축구장으로 바꾼다는 거예요. 아이 키우는 주민들은 다 반대하고 있어요.” –경기 수원시 주민 배모(41)씨
차를 세워 둘 공간, 시민 여가 공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놀이터가 사라지고 있다. 수원시 영통동 ‘수원어린이교통공원’은 이 일대 아이들에겐 ‘놀이명소’다. 특히 9~13세 사이 아이들이 차 걱정 없이 자전거나 인라인 스케이트를 배울 수 있는 ‘안전지대’다. 그런데 최근 이곳을 대규모 지하 주차장과 시민 체육 시설로 바꾸는 계획이 발표됐다. 어린 자녀를 둔 학부모들 사이에서 반발이 거센 건 당연하다.
지난 7월 종로구 성균관대 캠퍼스에 들어선 ‘경학어린이공원’은 학교 측 요청에 따라 두 달 만에 철거됐다. ‘문화재가 많은 지역 특성상 놀이 시설은 문화적, 경관적으로 적당치 않다’는 게 이유였다.
도시 계획 단계에서도 어린이공원의 입지는 우선순위에서 한참 밀려 엉뚱하고 외진 곳으로 결정된다. 심지어 주차공간과 놀이터를 합치자는 터무니없는 아이디어까지 나온다. 김연금 조경연구소 ‘울’ 소장은 “대다수 의사 결정자들이 50~60대 남성이다 보니, 젊은 엄마나 조부모처럼 ‘양육 최전선’에 있는 이들의 의견은 항상 배제된다”고 지적했다. 숙박업소나, 술집, 주차장과 같은 유해 및 위험 시설 바로 옆에 놀이터가 들어서는 이유다. 모텔과 입구를 마주한 광진구 자양동의 놀이터나, 대형 트럭이 드나드는 중구 신당동 대로변의 놀이터 정도는 우리나라에서 흔하다. 현행법상 어린이공원의 설치 기준에는 ‘주변 환경에 대한 평가’ 항목이 없다.
아이들의 놀이 공간 자체가 부족하기도 하지만, 아이들이 좋아하는 놀이기구가 하나 둘 자취를 감추면서 ‘놀이의 질’ 자체가 떨어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 소장은 “어느 순간부터, 놀이터에서 정글짐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그네나 회전 무대를 보기도 힘들다"며 "어른들이 보기에 ‘위험하다’는 게 이유인데, 과연 이런 환경이 아이들을 위한 걸까?”라고 되물었다.
전문가들은 적당한 수준의 ‘위험’이 아이들의 신체 및 정신 발달에 필요하다고 말한다. 김 소장은 “조금 다치더라도 모험을 해봐야 자신의 신체적 한계를 알고 스스로 통제력을 가지는데, 대다수 국내 놀이터에선 그게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사실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관리상 편의가 앞선 탓도 적지 않다. 아이들의 신체 활동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놀이기구일수록 고장이 잦고 보수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우리나라 아이들은 ‘지나치게 안전한’ 놀이기구를 위험한 방식으로 타고 논다. 지붕 위로 기어올라가 뛰어내리거나, 미끄럼틀을 역방향으로 오르는 등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자신만의 모험을 벌인다. 신체 활동이 극도로 위축되다 보니 설계자가 의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놀이기구를 이용하는 것이다. 김 소장은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짜릿한 경험’을 원한다. 트램폴린이나 짚라인, 암벽타기, 이런 것들에 유독 아이들이 몰리는 것도 어른들에게 ‘위험해 보이는 것’과 아이들이 ‘위험하다’고 느끼는 게 다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좋은 놀이터의 조건은 아주 간단해요. 바로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줄 수 있는’ 놀이터죠.” 그래서 김 소장은 아이들의 목소리를 수집했다. 어떤 아이는 ‘세상에서 가장 긴 미끄럼틀’을, 어떤 아이는 ‘마음 놓고 공을 찰 수 있는 운동장’을, 또 어떤 아이는 ‘대롱대롱 매달려 올라갈 수 있는 밧줄 타기’를 원했다. 서울 성동구의 행당동의 ‘어린이꿈공원’은 그런 아이들의 소망을 엮어 만들었다.
지난 15일 찾은 ‘어린이꿈공원’은 아이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서울 시내 놀이터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풋살장부터 휠체어도 올라갈 수 있게 만든 광활한 나무 데크까지, 오직 ‘어린이들’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김 소장은 “가장 좋은 놀이터는, 아이들이 누구의 도움도, 방해도 받지 않고 오롯이 ‘스스로의 힘’으로 모험을 할 수 있는 놀이터"라고 말했다.
한국 아이들의 실내 놀이 비중과 미디어 이용 시간은 매년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다. 대도시의 아이들 10명 중 7명 이상이 집에서만 놀고 있고, 하루 평균 3시간씩 휴대폰과 컴퓨터를 들여다본다(2017년, 육아정책연구소). OECD 평균치를 훌쩍 뛰어넘는 청소년 하루 평균 공부 시간까지 고려하면, 한국은 명실상부 ‘놀 권리 후진국’이다.
김 소장은 “놀이터도 중요하지만, 아이들을 무작정 한정된 공간 안에 밀어 넣을 것이 아니라, 동네 전체를 아이가 놓기 좋은 환경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답답한 집안, 손바닥만한 화면을 벗어나 ‘진짜 세상’을 샅샅이 탐험할 기회를 돌려줄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