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2세대 경영인 시대가 저물고 있다. 25일 이건희 회장의 별세를 전한 삼성전자를 포함해 현대차그룹과 LG그룹 등 주요그룹에서 파란만장했던 2세 경영인들의 부음이나 경영 일선 후퇴 소식이 전해지고 있어서다. 2세 경영인들은 창업주의 기업 정신을 이어 받아 강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기업을 세계적인 규모의 회사로 키워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현대차그룹에선 2세 경영인인 정몽구(82) 명예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나고 아들 정의선(50) 회장이 최근 새롭게 현대차 총수로 취임, 그룹을 이끌고 있다. 정몽구 명예회장은 부친인 고(故) 정주영 창업주에 이어 2세 경영인으로 그룹을 경영해왔다. 정 명예회장은 2000년 ‘왕자의 난’으로 불린 형제들 간 갈등 끝에 현대차 계열 회사를 분리해 독립했다. 분리 당시 계열사 10개(자산 34조원)에 불과했던 현대차그룹은 지난해 기준 계열사 54개(자산 234조원)를 보유한 기업으로 거듭났다.
정 명예회장은 2016년 12월 열린 국정농단 청문회에 참석한 이후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정 명예회장은 최근 대장게실염(대장 일부가 비정상적으로 늘어나 생긴 주머니에 염증이 생긴 질환) 증세로 서울아산병원에 입원하는 등 지병을 앓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재계 관계자는 “현대차그룹 측에서는 정 명예회장의 건강 상태에 대해 공식적인 언급을 자제하고 있다”며 “정 회장의 총수 취임은 정 명예회장의 건강 문제로 발생하는 긴급사태를 최소화하기 위한 선제적인 조치”라고 말했다.
지난해 12월엔 LG그룹 2대 회장으로 25년간 그룹을 이끈 구자경 LG 명예회장이 세상을 떠났다. 향년 94세였다. 구 명예회장은 LG 창업주인 구인회 회장의 장남으로, 45세이던 1970년에 LG그룹 2대 회장에 취임, 이후 그룹을 글로벌 기업 반열에 올려놨다. 구 명예회장의 취임 당시 연간 매출 270억원 규모에 불과하던 LG그룹은 그의 퇴임 시인 1995년 매출 38조원 규모, 재계 순위 3위에 자리잡았다.
아직까지 2세 경영인이 건재한 그룹은 한화나 롯데 등이다. 한화그룹의 경우 2세 경영인인 김승연(68) 회장이 현재 두문불출 하고 있지만 내년 2월 그가 경영에 복귀할 것이라는 전망이 적지 않다. 폐질환과 당뇨 등을 앓은 김 회장은 미국에서 치료를 받기도 했다. 내년 2월이면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에 따른 김 회장의 취업 제한이 풀린다. 한화그룹 관계자는 “김 회장은 현재 업무보고를 꾸준히 받고 있다”면서 “요즘에는 가끔 골프를 칠 정도로 건강하다”고 말했다.
김 회장이 경영에 복귀하려는 배경에는 경영 승계 작업을 마무리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김 회장의 장남인 김동관(37) 한화솔루션 사장은 지난달 28일 입사 10년 만, 부사장 임명 9개월 만에 사장에 오르는 초고속 승진을 했다. 재계 관계자는 “최근 미국 전기트럭 업체인 니콜라 사기 의혹으로 주주들 사이에서 후계자인 김동관 사장에 대한 불안한 눈초리가 생기자 조기인사 단행으로 후계 구도를 명확히 한 것”이라며 “특히 김 회장은 경영 복귀 이후 김동관ㆍ동원ㆍ동선 등 3형제 경영권 분쟁 가능성을 완전히 없애려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한화그룹 관계자는 "경영 승계작업을 검토하고 있지 않다"며 "김 회장의 경영 복귀와 김동관ㆍ동원ㆍ동선 등 3형제의 경영수업 과정이 병행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국내 2세 경영인 가운데 가장 활발하게 경영활동에 나서고 있다. 신 회장은 지난 두 달 간 일본에 머물며 일본롯데 경영 현안을 살피고 창업주인 고 신격호 명예회장의 현지 유산 상속 업무를 마무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1일에는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총리와 오찬을 겸한 회동도 가졌다.
최근에는 신 회장의 아들 신유열씨가 올해 일본 롯데에 입사한 것으로 확인됐다. 재계에선 신 회장의 뒤를 이어 신씨가 본격적인 경영 승계를 받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1986년생인 신씨는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 학교인 가쿠슈인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이후 노무라 증권에서 일하다 미국 콜롬비아대 경영석사(MBA)과정을 밟고 다시 노무라증권에서 근무했다. 신 회장도 가쿠슈인에서 학창시절을 보내고 콜롬비아대 MBA 과정을 거쳤다. 신 회장이 노무라 증권에서 사회생활을 하고 33세에 일본 롯데그룹에 입사한 것도 신씨와 유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