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제물론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百骸(백해) 九竅(구규) 六藏(육장) 賅而存焉(해이존언)'
이 문장 속에는 몸에 대한 동양적인 개념이 들어 있다. 그래서 몸이라고 콕 찍어서 말을 하지는 않았어도 몸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바로 알게 된다. 온전한 몸이 되려면 '100개의 뼈, 9개의 구멍, 6개의 장기… 이들을 모두 다 갖추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성인의 몸에는 206개의 뼈가 있다. 물론 사람에 따라 더 있을 수도 적을 수도 있다. 태어날 때는 더 많아서 300개 정도 된다. 그러니 우리 몸에 100개의 뼈가 있다는 말은 현대 해부학적 관점에서 보면 일단은 틀렸다. 그래서 '骸'를 뼈가 아니라 관절을 의미한다고 생각해 보았다. 일단 우리 몸의 관절은 대충 100개 정도 되니 수적으로 비슷하다. 또 동양의학에서는 몸을 구조보다 기능적인 측면에서 이해를 하는 경향이 있는 것을 고려하면 뼈대로서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뼈를 움직이는 운동이 더 중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운동은 관절에서 일어난다.
육장(6개의 장기)은 심장, 간장, 비장, 허파, 신장과 왼신장과 오른신장을 말한다. 몸에 있는 모든 장기가 다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몸 속에 있는 대표적인 장기들이다.
특이한 것은 뼈와 장기 외에 9개의 구멍(구규)이 있어야 몸이 온전해진다고 하는 점이다. 구규는 얼굴에 있는 눈, 귀, 코, 입 등 7개 구멍과 요도, 항문을 말한다. 이들은 몸과 우주를 직접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한다. 서양에서도 몸에 있는 이런 구멍들은 외부로부터 자극을 받아들이고, 몸 속의 노폐물 등을 내보내는 통로 역할을 하니 비슷한 개념이라고 해도 될 듯하다.
마지막에 있는 '賅而存焉'의 '賅'라는 글자는 '갖추다'라는 의미다. 그러니까 '겉에 있는 뼈대와 속에 있는 장기 그리고 몸과 외부를 이어주는 구멍들을 모두 갖추고 있어야 온전한 몸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의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갖추어 놓았지만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면 그것을 어떻게 온전함의 조건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러니 '갖춘다'라는 것은 '톱니바퀴의 이가 맞물려 돌아가듯 조화로워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사람들은 특성이나 규모면에서 다양한 집단과 조직을 이루며 살아간다. 한 집단 속에 다른 무리가 있기도 한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근간을 이루는 사회나 국가가 형태와 기능면에서 온전해지려면 구성원들이 전체적으로 조화롭고 순탄하게 각자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구성원들 간의 소통이 필수적이다.
'소통(疏通)'이 무엇인지는 누구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일상 속에서 소통에 장애가 있어 발생하는 문제가 참 많은 것을 보면 알면서도 실천하기 어려운 것임에 틀림이 없다. 국어사전을 보면 '소통'을 '막히지 아니하고 잘 통함'이라고 풀어 놓았다.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일단 막힌 것을 뚫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번 개천절 광화문광장에는 '차벽'이 등장해서 사람들이 다니는 길을 완전히 막았다. 누가 어떤 이유로 차벽을 세웠는지, 그것이 합당한 것인지를 따지려는 것이 아니다. 차벽을 보면서 우리 사회를 이루는 집단들 사이에 엄청난 장벽이 아직도 제거되지 못하고 남아 있음을 느낄 수 밖에 없었음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이 차벽이 개천절에 광화문광장에 모이려고 했던 사람들과 모이지 못하게 막으려고 했던 사람들 사이에만 존재할까? 우리는 너무나 자주 정부와 국민, 행정부와 입법부, 여당과 야당, 남과 북, 경영자와 노조 사이 등에 있는 불통의 장벽이 서로 가로막고 있음을 보아 왔다. 눈에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차벽이 세워져 있는 곳의 예를 들자면 끝이 없다.
어찌 해야할까? 차를 더 촘촘히 세워 두 집단을 아예 격리해야 할까? 아니면 한 대라도 차를 빼내어 틈을 만들어야 할까? 구규는 몸과 우주의 소통을 통해 우리 몸을 온전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구규가 서로 다르듯 소통의 창구나 방식도 다양할 것이다. 왕성한 소통의 통로가 다양하게 존재할 때, 이 사회는 더 조화롭고 온전해질 것으로 확신한다. 나부터 내 주위에 쌓아놓은 벽을 허물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