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럽지 못한 美 '프라우드 보이스'

입력
2020.10.04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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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토론서 "프라우드 보이스 대기하라"
백인 우월주의 단체 두둔으로 해석돼 논란

미국 대선 1차 TV 토론 다음날인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버지니아주(州) 패어팩스카운티의 월마트 매장. 연수 포함 미국 생활 13개월 만에 처음으로 실물 총알을 봤다. 스포츠용품 계산대 옆 잠금장치를 한 판매대 안에 총알 상자가 가득 놓여 있었다. 한 40대 백인 남성이 불콰한 얼굴로 산탄 총알 한 상자를 계산하더니 다시 소총용 총알 한 상자를 더 샀다. 상대적으로 치안이 안전한 곳에 살고, 총기판매점을 일부러 가보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도 총알을 팔 수 있다는 현실을 잊고 있었다. ‘총기 소유가 자유로운 나라’ 미국에 와 있다는 걸 깜박했던 셈이다.

문득 하루 전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입에서 나왔던 심상치 않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당시 토론에서 사회자는 백인우월주의 관련 질문을 던졌다. 트럼프 대통령이 즉답을 피하자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가 극우단체 ‘프라우드 보이스(Proud Boys)’를 언급했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은 “프라우드 보이스, 물러나서 대기하라”고 말했다.

대통령 발언 직후 이날 밤 온라인 공간에는 ‘대통령의 명령’을 받들겠다는 프라우드 보이스 회원과 지지자들의 글이 잇따라 올라왔다고 미 언론은 전했다. 미 보스턴글로브는 “스스로를 ‘서구 국수주의자(쇼비니스트) 음주 클럽’으로 부르는 프라우드 보이스에 대한 구글 검색 트래픽이 갑자기 치솟았다”고 보도했다.

프라우드 보이스는 최근 인종차별 항의시위에 맞불 집회를 여는 백인 극우단체로 입길에 올랐다. 극우 성향 개빈 매키니스가 2016년 만든 이 단체는 처음엔 무슬림, 유태인, 페미니즘 반대를 표방했고, 남성 및 백인 우월주의, 서구 국수주의를 더했다. 미 연방수사국(FBI)도 극단주의 단체로 주시하고 있다.

온라인매체 복스는 프라우드 보이스의 회원 체계가 4단계로 돼 있다고 전했다. 일단 여성은 회원이 될 수 없다. 서구 국수주의자라는 걸 남들이 알아도 상관 없다는 의미에서 자신이 프라우드 보이라고 선언하는 것부터 시작해 문신 같은 다음 단계도 있지만 폭력 조장이 가장 위험하다고 복스는 설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언급 이후 프라우드 보이스 단체 셔츠를 판다는 공지가 올라오는 등 짜고 치기 의혹도 제기됐다. 대통령의 측근이자 ‘정치공작의 달인’으로 불리는 로저 스톤 연루설도 나돈다. 복스는 “프라우드 보이스가 반(反)좌익주의를 표방하지만 이들에게 좌파는 ‘자신들이 싫어하는 모든 것’으로 정의된다”고 꼬집었다. 백인 남성 우월주의 외엔 특별한 이념도, 정책도 없다는 의미다.

문제는 대통령의 ‘물러나라’는 말보다 ‘대기하라’는 명령에 이들이 호응할 가능성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서 회복된 트럼프 대통령이 11월 대선 결과에 불복하며 동원 명령을 내리고, 대기 중이던 프라우드 보이스가 총기를 들고 집결하고, 무력 충돌이 사실상 내전 상태로 이어지는 경우, 2020년 미국 대선 최악의 시나리오다. 월마트의 그 남성도 대선 토론을 보고 대통령 명령에 따라 총알을 미리 준비하는 건 아니었을까, 걱정이 꼬리를 물었다.

워싱턴= 정상원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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