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는 이상적 상태가 아니라 갈등 조정과 해결 능력이다

입력
2020.10.05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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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독일 통일의 두 교훈

편집자주

한국전쟁 발발 70주년, 6ㆍ15공동선언 20주년을 맞아 이동기 강원대 평화학과 교수가 독일 경험을 통해 한반도 평화의 가능성을 모색해보는 글을 격주 월요일 ‘한국일보’에 연재했습니다. 이번 회를 마지막으로 연재를 마무리합니다. 관심과 성원을 보내주신 독자께 감사드립니다.



코로나19 역병 위기와 한국인의 최대 명절 추석을 맞아도 한반도 남북의 긴장과 불화는 쉬지 않는다. 10월 10일은 북한 조선노동당 창건 75주년이니 평양에서 또 군사 열병식과 대중 집회가 열릴지 모른다. 북한 지도부가 김일성 광장에 다시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과시하며 핵무장의 위용을 자랑할지 아니면 코로나 19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가 그것을 물릴지 지켜볼 일이다.

당 창건이야 그들 나름 기념할 수 있겠지만 연평도 공무원 피격과 실종 사건에 뒤이은 대규모 군사 열병과 정치 집회는 한국과 세계에 불안과 불신을 자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일을 할 뿐이겠지만 상대에게는 공포와 의심만 남는다. 그것이 분단 한반도가 겪는 불안과 불신의 이중적 악순환이자 적대의 상호작용 메커니즘이다.

‘분단 히스테리’는 그렇게 한반도의 맑은 가을 하늘과 푸른 땅을 덮는다. 남북 간 대화와 교류가 순조롭게 진행될 때도 금강산과 서해에서는 북한군에 의한 한국 시민 피격과 무력 충돌이 발생했음을 기억한다면 연평도 공무원 피격 사건을 둘러싼 고성의 소음은 새삼스럽지도 않다.

오히려 놀라운 것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이례적인 “남측에 대단히 미안”하다는 사과 표명이었다. 물론, 공식 사과에는 책임과 행동이 따른다. 연평도 공무원의 사연과 의도가 무엇이었던 간에 생명 존중과 긴장 완화에 초점을 맞춘 사후 대책들이 마련되어야 한다.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순조롭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런 사건들을 이성적으로 해결하는 절차와 능력이 돋아야 한다. 통일에 대한 공허한 망상 또는 평화체제에 대한 과다한 기대는 접고 먼저 접경지에서의 군사 충돌과 피격 사건을 이성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챙겨야 한다. 평화는 상태가 아니라 과정이고 평화는 제도가 아니라 능력이다. 정전체제를 극복하고 남북 간과 북미 간에 선린우호관계를 맺는 것이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핵심 도정이지만 그것이 엄격한 의미 그대로 ‘체제’가 될 리는 만무하다.

대결체제가 해결되어도 대결의 옛 당사자들은 끊임없이 갈등과 충돌을 겪는다. 유럽연합도 애초 평화지대로 등장했지만 최근 새로운 갈등과 격리로 20년 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위험과 분열지대가 되었다. 중국과 홍콩의 일국양제도 결국 홍콩의 민주화를 압살하는 과정으로 귀결되었다. 1990년대 많은 이들이 의존했던 서로 다른 정치체의 결합은 쉽지 않은 과제임이 드러났다. ‘평화체제’나 ‘정치체 연합’에 대해 새롭게 사고할 것을 자극했다.

낡은 적대가 해결되어도 새로운 갈등이 적대와 대결로 치닫는 것은 너무나 손쉽다. 적대와 대결은 한번 그 고리에 걸리면 자동 상승 장치에 올라타서 멈추기가 어렵다. 가속화되고 증폭되어 쌍방의 선한 의지나 신뢰 노력을 뭉개버린다. 반면, 신의와 선의의 교호작용은 어떤 자동 상승 장치를 갖고 있지 못하다. 자주 망가지고 멈출 뿐이다. 끊임없이 갱신되고 보수되어야 한다.

특히 한반도 서해 바다와 접경지는 그 자체로 ‘평화부재의 상승 공간’으로 봐야 한다. 남북이 교류협력과 평화관계를 위한 협정을 체결해도 그 곳은 상당 기간 위협과 불안의 공간으로 남을 것이다. 서해 접경지에서 발생하는 불안과 위험을 마냥 내버려둘 일이 아니다. 남북 쌍방의 선의와 선의를 끊임없이 교란하는 평화부재 상승 공간에 먼저 집중해야 한다. 거기서 능력을 올리고 방법을 찾으며 적대의 역동성을 고장 내고 가속 장치에 균열 내는 것이 그 외 모든 평화 과정의 전제이자 동력이다.



1989년까지 동서독도 교류와 협력이 질적으로 발전했지만 베를린 장벽과 동서독 국경에서는 계속 인명 살상과 피격 사고가 잇달았다. 그것은 동독 탈출자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동독 국경경비대는 동서독의 도로를 오가는 통행자들이 작은 규정을 어기면 여지없이 위협과 총격을 일삼았다. 동독 군인들은 그들의 매뉴얼대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평화정치가 그것마저 제거하지는 못했다.

다만 동서독은 그런 사건과 사고가 적대 상승 메커니즘으로 전환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교류가 활발하면 피격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 게 아니다. 사람들이 많이 오가면 당연히 사건과 사고도 더 빈발하고 오해와 위험도 증대한다. 그러니 그것을 위한 조정과 해결의 매뉴얼도 따로 갖추어야 했다.

독일의 평화정치와 통일과정은 한반도에게 직접 교훈을 제공해주지 않는다. 역사적 맥락과 정치적 배경이 너무도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한반도에게 풍성한 함의와 성찰거리를 제공한다. 둘로 요약하며, 글과 연재를 함께 맺는다.

먼저,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까지 동서독의 화해협력관계는 ‘평화정치’의 성격과 의미를 풍성히 제공했다. 냉전의 대결정치는 악한 상대와 선한 우리를 나눠 상대의 궤멸과 후퇴를 노린다. 대결정치는 제 전략을 숨긴 채 상대를 흔들고 불안과 공포를 낳고 불신과 의심을 만든다. 대결정치는 국가나 진영의 대표들이 제 권력의 거점에서 결집과 동원을 위해 적대 이미지를 유포하고 선동을 일삼는다. 대결정치는 안보를 평화로 우기며 실상 안보를 위기에 빠트린다.



반면, 평화정치는 공포와 불안이 낳는 심리적 소모 전략을 단념하는 오해 기제의 극복 노력이다. 평화정치는 적으로 간주된 상대와 함께 시간과 공간을 함께 나누는 경험 공유다. 평화정치는 자신의 우려와 관심을 말하고 상대의 요구와 주장을 듣는 상호이해의 소통 연습이다.

평화정치는 갈등 쟁점을 상대의 관점에서 보는 법을 배우는 학습 과정이다. 평화정치는 대화가 곧장 성과를 내지 못하더라도 상대에게 거칠지 않고 적대의 독소를 계속 빼는 절제 경험이다. 평화정치는 정의를 묵인하지 않되 그것에 발목 잡히지 않고 궁극의 목표를 위해 불의를 견디는 인내 실험이다. 평화정치는 불안한 현재를 극복하기 위해 출구를 모험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담력 훈련이다.

평화정치는 신뢰와 조정, 예측 가능성의 정치 덕목을 발견하고 발명하는 창조 행위다. 평화정치는 공감이나 양보가 약자의 징표가 아니라 자신감과 용기의 발현임을 알리는 계몽 작업이다. 서독의 정치지도자들은 평화정치의 역사를 새롭게 만들었다. 다양한 동서독 협력관계의 발전은 한반도에도 여전히 큰 자극과 용기를 준다.

동독 보다 북한이 더 강고하고 더 위험하기에 더 과감하고 더 실용적인 평화정치가 필요하다. 남북관계가 동서독 관계보다 더 복잡하고 더 가파른 국제환경에 놓여 있기에 더 주체적이고 더 능동적으로 주권 외교와 조정 정치를 시도해야 한다.

두 번째로, 독일통일에 대한 이상화를 버리고 그것을 더 비판적으로 살펴야 한다. 1990년 초부터 서독 정부의 동독 체제 흡수 과정은 ‘식민화’에 다름 아니었다. 서독 주민들의 다수는 동독 주민과 사회 소수자들의 통일 경험과 기억에 대해 어떤 관심도 없었다.

서독 출신 학자들은 대개 역사의 특정 목표와 결과를 바람직하고 필연적인 것으로 전제하며 복잡한 과정을 단선으로 축소하는 ‘휘그적 해석’에 갇혀 있다. 그들이야 독일통일을 뿌듯해 하며 단선적인 인과관계에 만족해도 되겠지만, 한반도의 우리는 그런 이상화와 낭만화에 빠져들 겨를이 없다. 서독 중심의 일방적 찬사를 극복해야만 더 많은 평화와 더 나은 공생의 지평을 찾을 수 있다.



아무리 분단 상황이 급하더라도 독일의 흡수통일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순 없다. 모든 통일은 선이 아니다. 아울러 통일은 ‘대박’도 ‘번영’도 아니다. 무지하고 무책임한 정치지도자들의 선전정치에 면역력을 키우고 오히려 그들이 더 능동적인 평화정치에 골몰하도록 촉구하고 보조해야 한다. 분단극복은 한반도 주민들이 더 평화롭고 더 자유로운 삶의 기회와 조건을 갖는 과정으로 규정해야 한다.

통일은 분단 적대를 해결하겠지만 새로운 갈등과 분열을 만들 것이다. 평화와 통일은 차이나 다름이 사라진 상태를 전제할 수 없다. 오히려 그 정반대다. 차이를 억압해 얻는 갈등의 봉쇄가 아니라 다양함이 낳는 풍요로움을 살리는 것이 평화다. 평화는 심지어 차이가 갈등을 낳아도 그것을 감당하는 것이다. 서로 다른 가치와 지향과 삶의 방식은 갈등을 유발하지만 평화는 갈등 자체를 억압해서 확보되는 동화나 균질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평화는 갈등을 정상적인 삶의 일부이자 관계의 한 형식으로 보고 그것을 이성적이고 문명적으로 비폭력적으로 다루는 과정을 뜻한다. 그것은 적대적 갈등을 극복하고 차이와 이질성을 평화적으로 인지하고 대하는 태도와 행위들에서 시작한다.

2019, 2020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독일통일 30주년을 맞은 독일정부가 기념의 주제어로 ‘독일은 하나이면서 여럿이다’고 정한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독일통일은 대화와 협상을 통한 이해관계의 조정, 협약을 통한 상호간 절제와 양해,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 더 많은 민주적 토론에 기초한 공동의 합의 과정 등의 중요성을 환기시킨 사건이었다. 그것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도 그들처럼, 아니 우리는 그들보다 더 나은 평화의 길을 달릴 수 있을 것이다. 그 동안 부족한 글을 읽어준 독자들께 감사드린다.

이동기 강원대 평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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