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 합법화를 둘러싼 해묵은 찬반 논쟁이 다시 불붙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으로 의료서비스 접근성이 떨어지는 남미에선 여성 건강권 보장 요구가 높은 반면 일부 유럽 국가들은 팬데믹 혼란을 틈타 낙태 규제를 오히려 강화하고 있다. 대선을 한 달여 앞둔 미국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보수성향 신임 연방대법관 지명으로 낙태 문제가 막판 이슈로까지 부상했다.
영국 가디언은 28일(현지시간)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낙태 합법화 공약을 이행하라는 압박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전날 아르헨티나 3개 일간지에는 작가ㆍ언론인ㆍ예술가 등 1,000명 이상의 공인이 서명한 '낙태 합법화 2020'이라는 광고가 실렸다. 이들은 "의회는 더 많은 여성의 희생을 막기 위해 관련 법안을 통과시켜야 한다"고 촉구했다. 인구의 77%가 가톨릭 신자인 아르헨티나에서는 2018년 상원의 부결로 낙태 허용법안이 부결된 바 있다. 올해는 지난 3월 페르난데스 대통령이 직접 임신 초기 낙태 합법화 법안을 발의하며 법안 통과에 대한 기대감이 컸지만, 코로나19 확산으로 의회가 화상회의로 진행되면서 흐지부지된 상태다.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코로나19 팬데믹이 각국의 낙태 규제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서 "유엔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전 세계적으로 4,700만명의 여성들이 피임약을 쓸 수 없게 됐다고 추정했다"고 전했다. 이는 의도치 않은 임신으로 이어질 수 있어, 엄격한 낙태 규제로 불법 낙태 시술이 만연한 남미에서는 여성의 건강권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요소다. 이에 아르헨티나뿐 아니라 콜롬비아에서도 시민운동가들이 현행 낙태 관련 규제를 유지키로 한 헌법재판소 결정에 대해 최근 소송을 제기했다. 이들은 소장에 "낙태를 범죄로 분류하는 건 여성의 기본권인 건강권을 침해한다"고 적었다.
남미와 달리 낙태 합법화 분위기가 강했던 유럽에선 정반대의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일부 보수ㆍ권위주의 국가가 코로나19 팬데믹을 틈타 규제를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가톨릭 국가인 폴란드가 대표적이다. 폴란드는 지금도 성폭행이나 근친상간, 임신부의 생명이 위태롭거나 태아가 위험할 때만 낙태를 허용할 만큼 가장 보수적인 낙태금지법을 시행하고 있다. 여기에 최근 우파 집권여당은 태아에 문제가 있더라도 낙태를 막는 법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와 관련한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다음달 22일로 예정돼 있어 여성인권운동가들의 우려가 크다.
영국ㆍ네덜란드 등과 비교해 낙태 허용 기준이 비교적 엄격한 독일에서는 낙태 시술을 할 수 있는 의사 부족 현상마저 나타나고 있다. 영국 BBC방송에 따르면 독일은 임신 12주 이내 여성이 국가지정기관에서 상담을 받은 경우에 한해 낙태를 허용한다. 따라서 독일은 낙태율도 상대적으로 낮아 의대에서 낙태 시술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BBC는 지적했다. 낙태 시술이 가능한 의사들은 모두 60~70대 고령으로, 의대생들은 민간 워크숍 등을 통해 낙태 시술을 배우고 있는 실정이다.
미국에서는 최근 별세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전 연방대법관 후임으로 보수성향의 에이미 코니 배럿 제7연방항소법원 판사가 지명되면서 냑태 논쟁이 대선 이슈로까지 떠올랐다. 미국에서 여성의 낙태권은 1973년 연방대법원 '로 대 웨이드' 판결 이후 반세기 가까이 인정돼 왔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27일 폭스앤프렌즈 인터뷰에서 "배럿 판사는 로 대 웨이드를 뒤집는 판결의 일부가 '확실히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