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프리카공화국에 입국하면 그를 피할 수 없다. 케이프타운 공항에서도 가장 먼저 만난 인물은 그였다. 넬슨 만델라(1918-2013). 공항 기념품 가게 입구에 기린과 나란히 서 있는 인형도 그였고, 그 나라 화폐 속 인물에서도 그는 빠지지 않았다. 서점에 꽂혀 있는 책도 ‘NELSON MANDELA’였다.
테이블마운틴을 올라가는 케이블카에서도 그를 느낄 수 있었다. 눈 아래 케이프타운 도심 너머 바다에는 로벤섬이 있었다. 27년 수형생활 중 19년간 살았던 곳이다.
로벤섬은 2009년 할리우드영화 ‘우리가 꿈꾸는 기적, 인빅터스’라는 제목으로 상영됐다. 인빅터스(invictus)는 굴복하지 않는다는 뜻의 라틴어다. 남아공의 흑백갈등과 화합을 다룬 이 영화는 1995년 남아공 럭비월드컵이 배경이다. 남아공 럭비대표팀 스프링복스가 요하네스버그 엘리스파크서 열린 결정전서 강자 뉴질랜드를 15대 12로 꺽고 챔피언이 됐다. 6만3,000여 관중 대부분은 백인이었다. 오랜 세월 아파르트헤이트로 알려진 인종차별정책에 몸서리쳤던 남아공 흑인들은 뉴질랜드를 응원할 정도로 갈등이 심했다. 이 팀의 초록색 유니폼은 증오의 대상이었다.
그런데도 만델라는 초록색 유니폼을 입고 백인인 럭비팀 주장 프랑수아 피아네르에게 우승컵 전달하며 활짝 웃었다. 다른 흑인이 그랬다면 폭동이 일어났을테지만 만델라니까 가능했다. 프랑수와는 선수들과 같이 로벤섬을 방문했고, 럭비팀과 백인을 믿어준 만델라에게 우승으로 보답했다. 흑백이 하나된 화합의 대표적 사건이다.
말은 쉽지만 1963년부터 1990년까지 로벤섬 교도소과 빅터 퍼스터 교도소 수감생활 27년을 생각하면 절대 백인을 용서하지 않아야 정상이다. 체포 직전 무장투쟁을 외치며 해외에서 군사훈련까지 받은 전력을 감안하면 더 그렇다. 1962년 체포될 당시 그는 ‘검은 별봄맞이꽃’으로 불리는 거물급 투쟁론자였다.
아파르트헤이트는 분리ㆍ격리를 뜻하는 아프리칸스어다. 백인우월주의에 뿌리를 둔 이 인종차별은 1948년 네덜란드계 백인인 아프리카나를 기반으로 하는 국민당 단독정부 수립 후 기승을 부렸다.
국민을 순수한 아프리카 흑인인 반투와 혼혈 유색인종, 백인으로 구분하는 주민등록법이 1950년 시작됐다. 도시 외곽 토지소유 금지, 백인과 결혼금지, 버스 승차분리, 참정권 부정, 거주지역 분리는 모두 전국민의 16%에 불과한 백인의 특권을 보장한 정책이었다. 식당 화장실을 따로 써야 하는 건 말할 나위 없었다. 심지어 국민당 정부의 군사연구소는 독초콜릿, 콜레라균 음료, 탄저균 담배, 살모렐라균 설탕, 마약 엑스터시 등 생화학무기를 실험하기도 했다.
1976년 6월 요하네스버그 주변의 흑인집단거주지역 소웨토에서 폭동이 일어나면서 유색인종의 반발은 끊이지 않았다. 정부에 반항하는 일부 백인에게는 ‘명예 유색인’이란 딱지를 붙여 블랙리스트를 작성했다.
이는 만델라가 1994년 5월 첫 자유총선거에서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뽑히면서 철폐되기에 이른다.
남아공에 대형 항공기가 유달리 많은 것이 아파르트헤이트의 영향이라고 한다. 대부분 아프리카 국가들은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뜻에서 남아공에 항로를 열어주지 않았다. 유럽과 미주, 인도를 가기 위해서 아프리카 국가들을 경유할 수 없었던 남아공은 적자를 감수하고 대형 항공기를 띄울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수인번호 ‘466/64’인 그가 피의 숙청 대신 ‘진실과 화해위원회’를 만들어 사회통합을 추진한 것은 다분히 현실적 이유가 큰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1990년대 초반 남아공 백인사회는 흑인과 국제사회의 저항과 압박에 의해 종말이 다가왔음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그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보복이었다. 아파르트헤이트 철폐후 80만명의 백인들이 남아공을 떠난 것이 증거다.
하지만 여전히 군부와 경제계를 쥐락펴락하던 백인사회의 뿌리깊은 영향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과거사 바로잡기를 끝까지 밀어부치면 유혈사태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만델라는 백인들이 만행을 이실직고하면 화해 차원에서 용서하고 포용하는 현실론을 택하게 된다.
억눌려 살았던 흑인사회의 반발을 잠재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가 만델라였기 때문이다. 백인에게 가장 위협적이었고, 가장 탄압을 받았던 투쟁론자가 복수 대신 내민 손을 흑백 모두 거부할 수가 없었다.
사실 만델라가 넘어야할 가장 큰 장벽은 그 자신이었을 것이다. 무장투쟁, 27년 투옥을 겪은 그는 대통령이 된 후 가장 먼저 스스로 정치보복의 유혹을 이겨야 했다. 마음만 먹으면 백인의 재산을 몰수하고, 군부를 장악한 후 감옥을 백인으로 채울 수 있었다. 남아공의 미래를 위해 그는 끝까지 자신을 내려놓았다. 우리 현대사에도 정치보복을 하지 않은 정치인이 있었다.
만델라의 철학은 정치를 넘어서고 있다. 감옥에서 애송했던 시는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의 ‘인빅터스’였다. ‘문이 얼마나 좁은지 아무리 많은 형벌이 날 기다릴지라도 중요치 않다. 나는 내 운명의 주인, 내 영혼의 선장’.
그는 감옥 안에서도 바깥에서도, 죄수였을 때도 대통령이었을 때도 자신의 주인이었다. 감사하는 마음은 그가 세상을 향해 따뜻한 시선을 보낼 수 있는 자양분이었다.
2013년 12월5일 그는 95세로 자서전 ‘자유를 향한 길고도 먼 여정’처럼 생을 마감했다. 5일 후인 12월10일 추모식장인 요하네스버그 FNB 월드컵경기장에서는 9만5,000여명이 외치는 “마디바(존경하는 어른)” 소리와 노래 “고마워요 타타(아버지)”가 빗속에서 울려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