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이맘때쯤 초등학생인 아이에게 맞힐 독감 백신 때문에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독감 바이러스 3가지 종류를 예방하는 3가 백신은 나라에서 접종 비용을 지원해 주니 무료로 맞을 수 있었고, 독감 바이러스 4가지를 예방하는 4가 백신은 국가 지원 대상이 아니어서 돈을 내고 접종해야 했다.
백신 접종에 따른 이득만 고려한다면 당연히 4가 백신을 주저 없이 맞히겠지만, 무료와 3만5,000원은 차이가 컸다. 더구나 무료 접종 지원을 받지 못하는 엄마 아빠의 접종 비용까지 고려하면 망설여지지 않을 수 없었다. 백신을 맞는다고 독감에 아예 안 걸리는 것도 아닌데 굳이 유료로 접종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가도, 3가 백신만으로 예방 효과를 기대할 수 없는 바이러스 유형이 유행한다면 돈을 내고라도 4가를 맞히지 않은 걸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
독감 백신은 다가올 가을, 겨울에 유행할 독감 바이러스 종류를 해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예측해 연초에 발표하면 제약사들이 이를 토대로 생산한다. 독감 바이러스 종류는 유전자 유형이나 처음 검출된 지역에 따라 나뉜다. 보통 3가 백신은 독감 바이러스 A형 중 두 종류와 B형 중 한 종류를 예방하도록 만든다. 4가 백신은 여기에 B형 바이러스 한 종류를 추가한다. 그런데 최근 들어 B형 독감 바이러스 두 종류가 동시에 유행하거나 3가 백신에 포함되지 않은 B형 바이러스가 유행하는 경우가 늘면서 예방 효과의 폭을 넓힐 필요성이 제기돼 왔다. 이를 감안해 작년엔 결국 가족 모두 4가 백신을 접종했다.
올해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때문에 독감 예방접종 필요성이 커지면서 아이가 4가 백신도 무료로 맞을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이번엔 아이들의 무료 접종 시작 시기가 9월 말로 예년보다 약 한 달 앞당겨졌다. 백신 접종 후 면역 작용의 핵심 역할을 하는 항체가 몸속에서 만들어지기까지는 대략 2주가 걸린다. 이후 6개월 정도 지나면 항체 수가 급격히 감소한다.
이처럼 백신의 면역반응이 제한적이고 독감 바이러스 유행이 보통 3월까지 이어지는 점을 고려하면 독감 예방접종은 10월 초·중순이 적기다. 너무 늦게 맞으면 면역력이 생기기 전에 독감이 먼저 유행하게 될 수 있고, 너무 일찍 접종하면 이른 봄에 여전히 맹위를 떨치는 독감에 무방비 상태가 될지 모른다. 때문에 해마다 되도록 10월 초 접종 일정을 지켜 왔는데, 올해는 코로나19라는 예외 상황이 닥친 만큼 빨리 접종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하지만 막상 무료 접종 시작일이 되자 작년보다 더 골치 아픈 고민이 생기고 말았다. 아이들에게 맞힐 독감 백신이 냉장 온도가 유지돼야 할 유통 과정에서 상온에 노출된 바람에 무료 예방접종이 갑자기 중단됐기 때문이다. 그 날 엄마들은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열어 놓고 고민에 빠졌다. 보건당국이 문제 생긴 백신 제품을 검사하는 데 약 2주가 걸린다고 했으니 그 전에 돈을 내고 백신을 맞혀야 하나, 기다려야 하나 헷갈렸다. 검사 결과를 기다리자니 좌불안석이고, 유료로 맞히려니 뭔가 손해 보는 듯했다.
나흘 지나 문제 백신을 제외한 다른 물량으로 무료 접종이 재개되긴 했지만, 아이가 맞을 백신이 정상적인 유통 과정을 거친 제품일지 의구심이 남는 건 여전하다. 문제 백신이 시중에 유통되지 않았다고 했던 정부는 많은 사람에게 이미 접종된 걸 확인했다고 뒤늦게 발표하면서 논란을 자초했다. 이런 상황에서 보건당국이 상온 노출 백신에 이상이 없다고 결론 내린다 한들 과연 아이들에게 맞혀도 될까 싶다. 일부 전문가는 상온에 노출된 뒤 당장은 괜찮을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유효 성분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제품의 효능이나 안전성이 허가받았던 대로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다.
어쨌든 무료 접종이 다시 시작됐으니 조금 기다렸다 예년처럼 적기에 맞히는 게 나을까. 그런데 만약 상온 노출 백신들을 검사한 결과 이상이 있어 많은 양을 폐기 처분해야 한다면 접종 물량이 모자랄 게 뻔해 보이니, 반대로 앞서서 맞혀 놓는 게 상책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아이 건강과 직결되는 어려운 상황이 닥칠 때 늘 엄마들은 선택에 내몰린다. 혹시 모를 온갖 시나리오를 가정하며, 여기저기 나도는 소문들에 눈과 귀를 열어 놓은 채 최종적으로는 아주 현명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부담감에 짓눌린다. 일하다 잠시 짬을 내 집 근처 동네 의원 전화번호를 누르며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수화기 너머 간호사는 “곧 백신이 바닥날지도 모르니 빨리 맞히셔야 된다”고 친절하게 알려줬다. 내 선택이 아이를 위한 정답이 아닐 수 있다는 게 엄마라는 직업의 최대 난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