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신규 확진자 규모가 사흘 연속 두 자릿수를 기록하며 안정세에 접어들던 중 뜻밖의 악재가 터졌다. 인플루엔자(독감) 백신 조달 계약 업체의 유통과정에서 대량의 백신이 상온에 유출됨에 따라 22일부터 예정됐던 전국 만13~18세 청소년과 임신부 등을 대상으로 한 독감 백신 무료 접종이 전격 중단된 것이다.
이에 따라 11월 초까지 국민 3,000만여명에 대한 독감 백신 접종을 마무리해 신종 코로나와 독감이 동시 유행하는 이른바 '트윈데믹'을 차단하겠다는 정부의 계획에 급제동이 걸렸다. 정부는 유통 중 안전성이 훼손됐을 우려가 있는 독감 백신 500만도즈(1도즈는 1회 접종분)의 접종을 중단하고 2주간 시험을 거쳐 이들 백신의 사용여부를 결정할 계획이지만 본격적으로 독감이 유행하는 11월 중순 전에 수순이 뒤로 밀린 모든 대상자의 접종을 마칠 수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만으로 구분이 어려운 신종 코로나와 독감 환자가 동시에 증가해 병원으로 이들이 몰릴 경우 의료시스템이 마비되는 상황도 우려된다.
이날 질병관리청과 보건복지부 등에 따르면 올해 독감 백신 생산량은 당초 2,964만 도즈로, 이는 전 국민의 약 57%에 접종할 수 있는 물량이었다. 정부는 사용가능 기간이 3~5년인 타미플루 등 독감 치료제도 전년 생산분 등을 포함해 639만명분 이상을 비축하고 있다. 당국은 이를 토대로 트윈데믹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의료시스템 붕괴를 우려할 필요는 없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21일 신성약품이 유통하던 백신 500만도즈 중 다량이 공급과정에서 상온에 노출돼 폐기의 기로에 놓이면서 돌연 상황이 급반전했다. 이 업체가 유통 중이던 500만도즈는 전체 백신생산 물량의 17%에 달한다. 정부는 "더 이상의 추가 백신 생산은 불가능하다"고 밝혀온 만큼, 이들 백신이 최악의 경우 전량 폐기된다면 올해 독감 유행 기간에 신종 코로나가 재유행할 경우 트윈데믹은 불가피해보인다.
이러한 우려에도 정부는 일단 "안심해도 된다"는 입장이다. 정은경 질병청장은 이날 "남반구에 해당하는 나라를 보면 독감 유행(가능성)이 예년보다 굉장히 낮다"고 설명했다. 우리보다 앞서 겨울을 난 호주, 뉴질랜드 등 남반구 사례를 볼 때 독감 유행이 거세지 않았고, 신종 코로나 대응에 만전을 기하다 보면 우리나라에서도 트윈데믹의 상황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취지다. 윤태호 중앙사고수습본부(중수본) 방역총괄반장도 "독감은 백신뿐 아니라 치료제도 충분히 비축돼 있어 통제 가능한 측면이 있다"며 "신종 코로나 대응을 철저히 하면 독감이 자연스럽게 잡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의 진단은 정부의 전망과 일치하지 않는다. 우선 남반구 국가들은 대체로 더 철저한 봉쇄정책을 썼고, 비교적 유행 초반이었기 때문에 그 효과가 두드러졌던 반면 우리나라는 거리두기 효과가 점차 떨어지고 있고 방역수칙도 연초에 비하면 잘 지켜지지 않아 손쉽게 트윈데믹을 비켜갈 수 있을지 우려된다는 것이다. 김우주 고대구로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남반구에서 독감 유행이 예년에 비해 적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신종 코로나 때문에 독감에 대한 감시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며 "자료 해석에 유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와중에 신종 코로나로 인한 호흡기ㆍ발열환자의 진료 공백을 막기 위해 추진했던 호흡기전담클리닉 설치도 정부와 의료계의 마찰로 늦어져 목표로 했던 연내 500개소 마련이 불투명하다. 지난해 계절독감 환자는 약 108만명으로, 올해도 이 정도 규모가 발생한다면 신종 코로나 환자와 뒤섞여 의료현장의 혼란을 가중시킬 수밖에 없다.
일각에선 트윈데믹이 아니더라도 이번 독감백신 상온노출 사고를 계기로 독감 예방접종에 대한 과도한 공포가 유발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독감 백신의 효능에 대한 불신으로 아예 접종을 꺼리거나, 반대로 물량 부족을 우려해 접종하려는 사람들이 급격히 몰릴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