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직전 판세를 반전시키는 사건을 뜻하는 '10월 깜짝쇼'가 올해는 2주 일찍 찾아왔다." 87세를 일기로 별세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미국 연방대법관의 후임 인선 문제로 벌써 달아오르기 시작한 공화당과 민주당의 힘겨루기에 대한 월스트리트저널(WSJ)의 평가다.
미국의 신임 대법관 임명 문제가 6주 앞으로 다가온 대선판을 뒤흔들고 있다. 대법원의 이념지형 변화가 이른바 '문화전쟁'으로 비화하는 낙태ㆍ성소수자ㆍ이민 등의 정치적 의제의 향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더욱이 대선 이후 불복 소송이라도 벌어질 경우 대법원 판결에 따라 대통령이 결정될 수도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긴즈버그 대법관 별세 하루만인 19일(현지시간) 노스캐롤라이나주(州) 페이엇빌 대선 유세에서 "내주에 (대법관) 후보를 지명하겠다"며 "재능있고 훌륭한 여성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앞서 백악관에서도 기자들에게 "아주 빨리 후보자를 제시할 것"이라고 했다. 보수성향 여성인 에이미 코니 배럿 제7연방고등법원 판사, 제11연방고법의 쿠바계 여성 바버라 라고아 판사 등 유력 후보자들 관련 질문에는 "매우 존경받는 법관들"이라고 답했다.
대법관은 상원에서 인준 청문회와 표결을 거치기 때문에 공화당 입장에선 행정부와 상원을 모두 장악한 지금이 대법원의 이념지형을 바꾸기에 가장 좋은 시기다. 미 대법관 9명은 긴즈버그를 포함해 진보 4명, 보수 5명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보수성향 인물을 지명하면 대법원의 확실한 보수화가 가능하다.
미치 매코널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도 긴즈버그 대법관 별세 직후 채 2시간도 안 돼 "트럼프 대통령이 후임자로 지명하는 인물에 대해 상원이 투표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소속 의원들에게 서한을 보내 "올해 '인준 싸움'을 진행할 것"이라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라"고 했다. 미 의회 조사국의 2018년 보고서에 따르면 대법관 후보 지명부터 상원 인준 표결까지는 평균 69.6일이 걸렸다. 매코널 원내대표는 "1993년 긴즈버그는 지명 발표 50일만에 임명됐다"며 "시간은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를 비롯한 공화당 의원들은 2016년 2월 버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의 대법관 지명 방침을 저지한 전력이 있어 말바꾸기 논란이 거세다. 당시 매코널 원내대표는 "대선이 진행될 때는 대법관을 지명하지 않는 것이 맞다"면서 "새 대법관은 대선에서 승리한 차기 대통령이 지명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공화당이 논란을 감수하면서까지 후임 대법관 인선을 서두르는 이유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인종차별 항의시위 등 트럼프 대통령에게 불리한 이슈를 무력화할 기회로 여기기 때문이다. 보수성향 대법관이 임명되면 임신중절을 합법화한 '로 앤 웨이드(1973년)' 등 기존 진보 판결이 뒤집힐 수 있어 백인 복음주의 기독교인 등 보수세력의 지지를 공고히 할 수 있다. 2016년 대선 당시 출구조사에 따르면 유권자의 4분의 1 이상이 스스로를 백인 또는 복음주의 기독교도라고 밝혔고, 이들 중 81%가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했다.
반면 트럼프 대통령의 보수 대법관 지명 강행이 오히려 민주당 지지층 결집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진보 성향이 뚜렷한 고인을 '슈퍼 히어로'로 여겨온 젊은층이 대거 투표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다. 이념성향이나 충성도 측면에서 민주당에겐 조 바이든 대선후보가 아우르기 어려운 지지층의 확대를 기대해볼 만하다.
상원 100석 중 공화당이 53석을 차지하고 있는 만큼 공화당이 하나로 뭉치면 민주당이 현실적으로 인준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공화당에선 수전 콜린스ㆍ리사 머코우스키 의원 등이 후임자 지명을 서두르는 데 대해 부정적이다. 하지만 톰 틸리스ㆍ마타 맥샐리ㆍ켈리 뢰플러 등 11월 선거를 앞두고 고전 중인 출마자 다수는 임명 강행을 지지하고 있다.
미국 '진보 진영의 아이콘'으로 불려온 긴즈버그 대법관은 전날 췌장암 합병증으로 별세했다. 미국 역사상 두 번째 여성 대법관이자 '여성 최초' 수식어를 달고 다닌 고인은 대법관으로 재직한 27년간 사법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는다. 버지니아군사학교의 여성 입학 불허에 대한 위헌 결정, 동일노동 동일임금 지급 등 소수자를 대변하는 전향적 판결에 앞장섰다.
트럼프 대통령과는 대척점에 서 있었다. 그는 2016년 대선 당시 트럼프 대통령을 '사기꾼'으로 부르며 강도 높게 비판했고, 숨지기 며칠 전엔 "내 소망은 새 대통령 취임 때까지 자리를 지키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