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선언 2년] 그날 밤, 브룩스 美사령관이 국방부로 달려갔다

입력
2020.09.18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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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ㆍ19합의 '산파' 여석주 전 국방정책실장 인터뷰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18년 9월 19일 '평양공동선언'에 서명한지 2년이 흘렀다. 두 정상이 두 손 꼭잡고 약속한 개성공단ㆍ금강산관광 재개는 북미 간 비핵화 협상 교착에 발목 잡혔고, 남북한 철도 연결사업, 이산가족 상설면회소 설치, 올림픽 공동 유치 등 합의는 김 위원장의 외면에 찬밥 신세가 된지 오래다. 그 사이 김 위원장의 조기 답방 약속도 흩어지고 말았다.

평양공동선언 중에서도 유독 깨졌다고 말하기 어려운 합의가 있다. 두 정상이 부속합의서로 채택한 9ㆍ19 남북군사합의다. 지상ㆍ해상ㆍ공중에 각각 완충 구역을 설정하고 적대 행위를 금지하는 것을 골자로 한 이 합의는 북한의 창린도 포 사격(2019년 11월)을 비롯해 한 두차례 고비를 맞긴 했다. 그러나 북한은 합의를 파기하겠다는 뜻으로 볼 만한 수위의 군사 행동은 하지 않았다.

남측의 모든 대화 제의를 거부 중인 북한이 유독 9ㆍ19 합의를 준수하고 있는 이유는 뭘까. 이행 진정성은 있는 걸까. 또는 북한은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는데 "북한 나름대로 합의 준수 의지가 있다(16일 이인영 통일부 장관)"고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16일 만난 여석주 전 국방부 국방정책실장은 "북한이 분명한 합의 이행 의지를 보이고 있다"고 단언했다. "그렇게 자주 날아오던 북한 무인기가 합의 이후 종적을 감췄다. 철수된 비무장지대(DMZ) 내 GP(감시초소) 병력도 여전히 DMZ 바깥에 머물고 있다. 이것이 이행 의지가 아니면 무엇인가"라고 반문하면서다.

여 실장은 2018년 남북 간 협상과 합의문 작성 과정의 실무 총괄자 격이었다. 그는 9ㆍ19합의에 대해 "참 지키기 쉬운 합의"라고 했다. 남북의 기본 작전 태세에 영향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총구만 닫고 있자'고 약속한 게 9ㆍ19합의라는 것이다.

여 실장이 9ㆍ19합의의 운명을 걱정하지 않는 건 아니다. 그는 "북한도 이 합의로 얻는 이득이 있는 만큼 당장 깨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합의 이행이 정착되려면 근본적 외교 환경, 즉 북미 간 비핵화 협상의 진전이 담보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9ㆍ19합의가 성공적으로 이행되고 있다고 보나.

"9ㆍ19합의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남북이 설정한 완충 구역 내 군사 행위를 금지 등 '무엇무엇을 하지 말자'는 파트가 있다. 나머지는 군 당국 간 직통전화설치, 남북군사공동위 구성 등 '무엇무엇을 하자'는 파트다. 전자는 이행되고 있지만, 후자는 진척이 없다. 절반의 성공이다. 단, 합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완충 구역이 지켜지고 있는 만큼 대체로 이행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남북관계가 지금처럼 경색됐는데도 9ㆍ19합의가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나.

"살아 있다. 물론 9ㆍ19합의를 만들 땐 한반도평화프로세스로 가는 디딤돌이길 바랐다. 남북 소통이 지체되면서 디딤돌의 의미는 다소 퇴색했지만, 남북관계가 여기서 더 후퇴하진 못하도록 하는 '받침목'으로서의 의미가 살아 있다."

-"9ㆍ19합의는 대북 항복 문서"라는 식의 비판이 계속된다.

"대북 대비 태세에 구멍이 날 것이란 비판에도 실제 그런 구멍이 생기지 않았다는 게 중요하다. 9ㆍ19합의의 기본 정신은 남북 간 군사대결로 훼손된 정전 협정을 복원하고, 지키기 쉬운 것부터 합의해보자는 것이었다. 9ㆍ19합의를 비판하는 것은 정전 협정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여담이지만, 9ㆍ19합의에 담긴 여러 아이디어는 합의를 가장 맹렬하게 비판한 신원식 장군(현재 국민의힘 의원)에게서 나왔다."

-무슨 말인가.

"신 의원이 국방부 정책기획관이었던 2011년 무렵 해당 부서에서 '군비통제 추진이행계획' 보고서를 만들었다. 남북 간 우발적 충돌을 막기 위한 좋은 아이디어들이 많이 담겼다. 그 계획에서 이행하기 쉬운 부분을 골라 만든 게 9ㆍ19합의다. 당시 그 계획서에 서명한 신 장군이 지금은 9ㆍ19합의의 대표적 비판론자가 된 것은 아이러니다."



-합의 전후 주한미군의 불만이 많았다던데.

"3차례의 남북 간 장성급 협상이 있었다. 그 중간 중간에 유엔사령부 참모장(미군 소장)을 통해 우리의 목표와 전략을 설명했다. 합의 직후엔 송영무 당시 국방부 장관이 직접 설명했다. 합의가 발표된 날(2018년 9월 20일) 늦은 밤에 평양에 갔던 송 전 장관이 서울로 복귀했다. 복귀하자마자 빈센트 브룩스 당시 주한미군사령관을 국방부로 불렀다. 합의 내용과 평양에서 보고 들은 것을 설명했다. 브룩스 사령관은 '언제나 많은 내용을 공유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합의가 깨질 수 있겠다는 우려는 하지 않았나.

"북한의 개성 남북연락사무소 폭파(올해 6월16일) 때다. 직후에 북한은 대남 군사행동을 예고하고 실제로 GP 병력 복원 움직임도 잠시 보였다. 북측 GP가 복원되면, 남측도 상응 조치로 GP를 복원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합의는 파국이다.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김정은 위원장이 끝까지 합의를 지킬까.

"9ㆍ19합의로 북한은 군사활동에 들어가는 병력과 비용을 아꼈다. 김 위원장은 최근 민생을 강조하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수해 등으로 경제적 난국에 처한 지금, 전방 화력을 복원하긴 쉽지 않을 것 같다. 비핵화 재협상 여지도 남겨뒀다. 9ㆍ19합의를 깰 경우 비핵화를 포함한 평화체제 전환에 대한 의지가 의심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김 위원장도 알고 있을 것이다."

-비핵화 협상이 재개되지 못하면, 9ㆍ19합의도 위험해지나.

"그렇다. 합의 이행이 장기적으로 안정화되려면 외부 환경(비핵화 협상 재개)도 따라줘야 한다."

-그간 언론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았는데.

"남북관계 회복이 지체되다보니, 국민 절반은 9ㆍ19합의가 이미 깨진 것으로 오해하고, 나머지 절반은 아예 잊었다. 9ㆍ19합의는 깨지지 않고 매일매일 이행되고 있다.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조영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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