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 독재와 민주 진영의 대립은 오래 전 종지부를 찍었지만 한국 정치는 이를 거대 여야의 접점 없는 갈등으로 대체한 듯하다. 입으로 ‘협치’를 외치면서 다른 의견을 경청할 준비 안 된 정치인이 많다. 두고 보자고 벼르다 정권이 바뀌면 복수심에 불타오르는 이들이 차고 넘친다. 국회가 국민의 이익에 무관심하고, 시대 변화에 둔감한 것이 당연하다.
초선이 절반으로 역대급이라는 21대 국회도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눈에 띄는 의원이 없지 않다. 신생 정당 시대전환의 비례대표 조정훈 의원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오랜 세계은행 근무를 접고 국내 정치에 뛰어들어 차분하고 절제된 대정부질문과 기본소득 법안 발의로 주목받는 조 의원을 17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만났다.
-지난 7월 국회에서 '따끔'하고도 '예의' 바른 대정부질문이 화제였다. 국회의원을 입법노동자라 부르고 보좌진과 사이에 ‘○○님’ 주고 받는 호칭도 신선하다. 운전도 직접 한다고 들었다. 흔히 보는 국회의원과 다른 모습이다.
“18년 동안 해외에서 여러 나라 정치인과 교류하면서 그런 모습을 너무 당연하게 여기게 됐다. 유럽에서는 정부 관료나 국회의원과 회의하고 지하철 타고 집에 가고 식당에서 격의 없이 식사했다. 의전이 따로 없다. 국회의원 되는 것이 가문의 영광이라는 전통시대부터의 문화가 매우 어색하다. 산업화, 민주화 세대를 이어 새로운 정치를 하겠다는 30, 40대에게는 이런 인식이 자연스럽다.”
-세계은행에서 일하며 각국의 개발 업무를 하다 국내 정치에 관심 가진 이유는.
“미국 워싱턴DC의 세계은행 건물 왼쪽에는 국제통화기구(IMF)가 있고, 한 블록 더 가면 백악관과 그 맞은편에 미 재무부가 있다. 거기서 미국 관료들과 이야기 나누고 1년에 120일 해외 출장을 다니며 왜 부자 나라는 부자고 가난한 나라는 가난할까를 늘 자문했다. 그럼 우리나라는 뭘까라는 생각에도 이르렀다. 시대전환이라는 정당을 만든 건 시대 전환을 꿈꾸겠다는 것이 아니다. 시대는 이미 전환되고 있는데 그 파도를 따라잡아 제대로 타보자는 것이었다. 전환의 시대를 위기가 아니라 기회로 삼자는 뜻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인연으로 국내 정치에 발을 디뎠는데 지금은 정부 정책에 상당히 비판적인 것 같다. 한국형 뉴딜을 ‘쓰레기 일자리’ 만들기라고 했다.
“지금 경제정책은 전환적이지 않다. 시대는 급히 바뀌는 데 기존 정책을 짜깁기만 하고 있는 느낌이다. 기존의 정책에 돈을 조금 더 쓰는 것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한국형 뉴딜이나 2차 재난지원금 선별 지급 등을 보며 전환이 아니라 기존 정치의 무거운 관성을 느꼈다.”
-플랫폼 근로자 등에게 경력증명서 발급하자는 법안을 1호로 제출했다. 미래 노동시장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하자는 취지인가.
“지금 노동의 담론은 정규직ㆍ비정규직에 갇혀 있다. 비정규직의 무조건 정규직화에 동의하지 않는다. 사업해 본 사람은 비정규직의 필요성을 인정할 것이다. 문제는 노동의 형태가 사회계층화됐다는 점이다. 정규직이 1등이고 그 아래 비정규직, 일용직, 플랫폼 노동자가 서열화된다. 미래는 플랫폼 노동 세상이다. 노동의 유연화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소득 보장, 생활 안정을 꾀하는 것이 핵심이다. 동일한 노동이라면 플랫폼 노동이 가장 비싼 값을 받아야 한다. 그들은 노동의 불안정성을 감내하기 때문이다. 경력증명서는 플랫폼 노동자를 사업자가 아니라 노동자로 인정하자는 것이고 그들에게 맞는 복지를 확충하자는 것이다.”
-선별 지급으로 가닥 잡은 2차 재난지원금 정책을 어떻게 평가하나.
“재난 상황에서는 속도감과 과감성이 중요한데도 정책의 정교함을 우선하겠다는 발상이다. 정확한 평가는 통계가 나온 뒤 할 수 있겠지만 아마도 거시경제에는 의미가 없거나 1차 때의 절반에도 못 미칠 것이다. 식당 운영하는 노부부라면 한 차례 직접 지원금보다 재난지원금 받은 손님들이 와서 팔아주기를 더 바라지 않을까. 소상공인연합회에서 전국민 2차 재난지원금을 말한 것도 그런 이유다.”
-대정부질문에서 ‘양극화 해소’를 강조했다. 이 구호를 새삼 들고 나온 이유는.
“우리 사회가 양극화 문제 해결을 포기하는 것 같아서다. 5, 6년 전쯤 교육 문제가 뜨거웠지만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별로 안 한다. 교육이 나아졌다기보다 이제는 지쳐서 더 말하기를 포기한 것 아닌가. 양극화 문제도 그런 길을 밟을까 두렵다. 한국형 뉴딜을 비판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린뉴딜, 디지털뉴딜을 잘 해서 우리 사회가 빛나 보이더라도 양극화가 그대로라면 개선이라고 할 수 없다. 이 문제를 정치의 중심으로 끌어오고 싶다. 문재인 정부가 애는 쓰지만 급소를 못 찾아 모든 지표가 나빠지고 있다.”
-국내 첫 기본소득법안을 발의했다. 어떤 취지이며 어떤 형태로 얼마나 지급하자는 것인가.
“기본소득은 양극화 문제와 연관된 복지정책이며 경제정책이다. 우선 선별적 복지제도의 사각지대를 즉각 해소하는 효과가 있다. 부자에게 줄 이유가 없지 않느냐는 문제 제기를 하지만 소득이 높으면 과세율이 높으므로 최고소득 구간은 40%를 세금으로 다시 거둬들인다. 15조원이 든다면 5조원은 환수되므로 재분배 효과도 있다.
거시경제적으로는 구매력을 확보하는 수단이다. 산업화 시대에는 저축에 대한 인센티브가 강했다. 가계소득을 억제해서 그 자금을 기업에, 그것도 특정 대기업에 쏟아부어 수출 주도로 성장했다. 하지만 이런 모델은 한계가 있다. 수출이 아니라 내수 중심으로 가야 한다. 국내 수요가 늘어나야 하는데, 그러려면 기업이 아니라 가계로 돈을 보내야 한다. 기본소득만큼 효과적인 수단이 없다.”
-정부가 전 국민에 거저 돈을 준다는데 대한 심리적인 거부감이 없지 않다. 기존 제도를 기본소득으로 대체해 복지가 후퇴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늘고 있는 기업 보조금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개인 보조금을 두고는 논쟁을 벌인다. 양극화 중에서도 중요한 격차가 위험의 격차다. 자산이 많아 위험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사업이 망하더라도 재도전이 가능하다. 그렇게 실패하다 한 번 기회를 만나 성공하는 것이다. 반대로 한 번 넘어지면 평생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 경제의 당면한 화두는 혁신이다. 소수만 실패를 감당할 능력이 있는 사회에서는 혁신 역량이 낮을 수밖에 없다. 그런 차이를 극복하는 한 가지 방법이 기본소득이다. 처음은 30만원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별거 아닌 것 같지만 50만원, 100만원, 150만원으로 늘어나면 노동이 자본과 대결할 수 있다.
기본소득을 도입했다고 공공복지를 없애서는 안 된다. 현금성 복지 중에 사회적 약자에게 가는 것 중 기본소득보다 높은 것은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 재원을 마련하려면 결국 증세를 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세부담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하위 수준이다. 증세 여력이 없지 않다.”
-세계은행 업무로 각국을 다니며 이해조정자 역할을 많이 했을 것 같다. 국회는 늘 협치를 부르짖지만 여전히 갈등이 넘쳐난다. 무엇이 문제라고 보나.
“여야가 서로 교류를 안 한다. 지금까지 70, 80명 의원들을 찾아갔다. 임기 중 모든 의원을 적어도 한 번 이상 만날 것이다. 하지만 여야 모두 상대 의원실에는 거의 안 간다. 권력이 집중된 대통령제, 승자독식체제인 국회의원 소선거구제 등에서 오는 구조적인 문제도 있을 것이다. 산업화, 민주화 시대의 대결구도에 익숙한 선배들이 많은 것도 이유로 볼 수 있다. 실용을 앞세우는 세대가 국회에 더 많아야 한다.”
-지난 총선에서 선거제법 개정의 수혜를 직접 봤는데.
“국민의 다양한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저같은 사람이 국회에 10, 20명쯤 더 있으면 어땠을까, 이런 사람들로 구성된 교섭단체가 생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 국민은 청년 정치인에게서 기성정치의 답습을 기대하는 것이 아닐 테고 그런 여망에 부응해 신인들이 국민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다면 우리 정치도 더 빠른 속도로 바뀌어 갈 것이다. 의석 60%를 정치신인에게 양보하는 어퍼머티브 액션(소수자 우대) 같은 걸 도입하는 건 어떨까. 코로나가 진정 되면 이런 정치 전환의 담론이 반드시 나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