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모자 소녀'는 왜 빨간 모자를 썼나

입력
2020.09.10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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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명작동화에서 빠지지 않는 ‘빨간 모자를 쓴 소녀’(원래 빨간 두건, 빨간 망토의 의미가 강하지만, 한국에서는 모자로 널리 알려져 있어 이에 따른다)에서 소녀의 모자는 왜 빨강일까. 오래 전부터 아이들에게 빨간색 옷을 입히는 관습일수도 있고(역사학), 이야기가 성령 강림 축일에 일어났기 때문일 수도 있다(전례학). 또 사춘기 소녀의 마음속 깊은 곳 늑대와 잠자리를 같이하고 싶다는 욕망을 반영했거나(정신분석학), 고전 동화에 자주 적용된 세 가지 색의 원칙을 따랐을 수도 있다(의미론).

'빨강의 역사'는 색 연구의 권위자 미셸 파스투로(73)가 파랑(2000년), 검정(2008년), 녹색(2013년)에 이어 내놓은 네 번째 책이다. 고대사회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서 드러나는 빨강을 파헤친다.

저자에 따르면 고대 사회에서 빨강은 가장 원초적이고 우월한 색이었다. 선사시대 때부터 벽화와 토기뿐 아니라 신체에도 붉은색을 썼다. 빨간색은 불과 피를 의미했다. 인간에게 이로우면서 위험했고, 생명이자 곧 죽음이었다.




중세 들어 빨강은 권력을 의미했다. 교황과 추기경은 붉은색 옷을 입었고, 유럽의 왕과 황제들도 빨강을 상징으로 삼았다. 붉은 색 자체가 "자신의 권력을 표명하는 행위"였다. 12세기 들어 빨강의 위상이 흔들렸다. 하늘과 빛을 파랗게 표현하면서 파랑이 급부상했고, 종교개혁 이후 빨강은 지나치게 눈에 띄는 비도덕적이고 퇴폐적인 색으로 취급당했다. 18세기 프랑스 대혁명 이후 빨강은 혁명을 상징하는 정치 도구가 됐다.




빨강은 달라진 게 없다. 달라지는 건 의미를 부여하는 사회다. 지금 빨간색은 에로티시즘, 여성성을 상징한다. 산타클로스에서 보듯 기쁨과 축제의 색이기도 하다. 적색경보처럼 위험을 알리기도 하면서 레드카펫 등에 쓰이는 장엄한 색이기도 하다. “색을 만들고 거기에 어휘와 정의를 부여하고, 코드와 가치체계를 구축하고, 관행을 조직화하고, 쟁점사항들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사회다. 색의 문제는 사회의 문제다.”

강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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