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드윅 보스먼은 왜 투병 사실을 숨겼을까

입력
2020.09.16 04:40
18면

편집자주

좋아하는 감독, 좋아하는 배우를 영화 한편만으로는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영화와 저 영화를 연결지어 영화에 대한 여러분의 지식의 폭을 넓히고 이해의 깊이를 더하고자 합니다.



미국 독립영화 ‘오스카 그랜트의 어느 하루’(2013)는 흑인 청년 오스카의 하루를 그린다. 2009년을 맞아 새 삶을 살기로 마음 먹은 그는 여자친구와 불꽃놀이를 보러 갔다가 불운을 맞는다. 새해 첫날 백인 경찰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나야 했던 오스카의 최후는 실화다.

‘오스카 그랜트의 어느 하루’는 라이언 쿠글러 감독의 데뷔작이다. 2013년 선댄스영화제 극영화 부문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하는 등 여러 상을 받았다. 쿠글러 감독은 이 영화를 발판으로 ‘크리드’(2015)를 연출한 데 이어 마블 영화 ‘블랙 팬서’(2018)의 메가폰까지 잡게 된다.

오스카를 연기한 마이클 B. 조던은 ‘블랙 팬서’에서는 사연 있는 악당 에릭을 맡았다. ‘블랙 팬서’는 ‘오스카 그랜트의 어느 하루’와 여러 면에서 조응한다. 에릭의 아버지는 가상의 아프리카 왕국 와칸다의 왕자 엔조부다. 국왕인 형의 지시로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오스카가 살던 곳이고, 1965년 미국 급진 흑인단체 블랙 팬서가 결성된 도시다)에서 첩보 활동을 한다. 엔조부는 경찰에 살해까지 당하는 흑인의 비참한 현실에 분노한다. 와칸다의 첨단기술을 빼돌려 무장 반란을 도모하다 숨진다. 에릭 역시 아버지를 따라 급진주의자로 성장한다. 오스카를 연기한 조던이 극단적인 투사 에릭으로 분하니 호소력이 짙다.



와칸다의 새 국왕 티찰라(블랙 팬서)는 사촌 에릭과 반대 편에 서 있다. 폭력을 앞세우지 않는다. 당장 ‘눈에는 눈’으로 대응하기 보다 관용과 인내를 앞세운다. 무력에 의한 단기적 성취보다 비폭력에 기댄 진정한 승리를 원한다.

지난달 28일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채드윅 보스먼의 연기 궤적은 티찰라를 맡기에 적합하다 할 만큼 일관됐다. ‘42’(2013)에서 메이저리그 최초 흑인 선수 재키 로빈슨을 연기했고, ‘제임스 브라운’(2014)에선 솔 음악의 대부 제임스 브라운으로, ‘마셜’(2017)에선 미국 최초 흑인 대법관 서굿 마셜로 각각 변신했다. 폭력이 아닌 긍정의 힘으로 인종 차별을 딛고 재능을 발휘한 흑인들이었다.



보스먼의 역할들은 우연이 아니었다. 신념의 결과물이었다. 보스먼의 매니저는 “보스먼이 항상 빛을 가져오는 역할을 골랐다”며 “사람들이 매일 총을 쏘고 어둠을 영속화시키는 그런 영화를 절대 하지 않았다”고 미 연예전문지 할리우드리포터에 최근 밝혔다.

보스먼은 ‘블랙 팬서’ 촬영 전부터 암과 싸웠으면서도 투병 사실을 감췄다. 스크린 안팎에서 언행을 일치시키려 했던 의지의 표현으로 읽힌다. 현명하면서도 용기 있는 흑인 영웅을 연기하는데 투병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걸 원치 않았으리라.

보스먼의 유작은 ‘Da 5 블러드’(2020)다. 얄궂게도 베트남전에서 전사한 흑인 분대장 노먼 역할을 맡았다. 스파이크 리 감독은 보스먼의 운명을 예감한 것일까. 노먼은 죽은 지 50년이 지나도 옛 분대원들에게 정신적 지주 같은 존재다. 미 프로농구(NBA) 스타 출신 카림 압둘 자바는 최근 칼럼을 통해 보스먼를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링컨 기념관처럼 강력한 영상 기념물이다… 그의 이름 자체만으로도 진실성과 용기를 지닌 흑인 이미지를 빚어낸다.”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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