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장애인은 261만 8,000명(작년 말 기준)에 달한다. 전체 인구 100명 중 5명은 장애인으로 결코 작지 않은 숫자지만, 주변에서 그들을 찾아보기란 생각만큼 쉽지 않다.
왜 그런 걸까. 아마도 장애인들이 주로 폐쇄된 공간에서 그들끼리만 어울리고, 스스로 비장애인과 교류하는 걸 차단한 것이 원인일 수 있다. 실제로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비장애인 가운데 장애인과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비율은 17.9%에 불과하다.
그러나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교류가 활발하지 않으면, 장애 인식개선을 더디게 만들 뿐이다. 특히 장애인이 다큐멘터리 속 안타까움의 대상으로만 계속 비춰지게 되면, 왜곡된 시선이 비장애인의 머리 속에 겹겹이 쌓여 장애인들은 점점 더 위축되고 수동적 존재로 머무르게 된다.
‘이래선 안 되겠다’며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장애인들이 있다. 그들은 ‘불편하지만 불행하진 않다’며 유튜브 영상을 통해 비장애인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자신들의 일상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장애인으로 살아가며 느낀 편견과 생활 속 불편을 있는 그대로 알려주는 게 소통을 강화하고 오해를 줄일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한국일보는 세상 속으로 당당히 뛰어든 화제의 시각장애인과 청각장애인, 지체장애인, 다운증후군 장애인을 차례로 만나 우리가 몰랐던 그들의 속 깊은 이야기를 들어봤다.
인터뷰 약속시간보다 일찍 나타난 김한솔(27)씨는 지팡이 없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언뜻 보기엔 시각장애가 전혀 없어 보였다. 거리에 대한 감이 좋다는 그는 "두세 번 방문해 본 장소는 혼자서도 문제없이 찾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김씨는 10년 전 시력을 잃었다. 병명은 '레버 시신경 병증'. 중심 시야에 생긴 검은 점이 점점 넓어져 시야가 가려지는 희귀병이다. 김씨는 처음엔 자신에게 찾아온 불행이 믿기지 않았다. ‘초록색을 보면 눈이 좋아진다’는 말에 며칠 동안 나무만 쳐다보기도 했고, 초록색 색종이를 사서 눈에 갖다 붙이기도 했을 정도였다.
상대방 눈을 맞추지 못하면서 그의 고개는 저절로 숙여졌다. 친구들이 동물을 보듯 달라진 그의 모습을 보며 장난을 치자 더욱 위축됐다. 보는 것을 잃은 충격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의사소통 과정은 점점 험난해졌고, 김씨는 결국 고등학교를 자퇴했다.
예전처럼 종이에 글씨를 쓸 수 없게 되자, 그는 점자로 ‘ㄱㄴㄷ’를 쓰는 것부터 다시 배워야 했다. 그러다가 열아홉 살에 다시 고개를 들 수 있었다. 복지관과 교회에서 만난 장애인 친구들과 만나면서부터다. “비장애인은 시각장애인이 음식물을 쏟으면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지만, 정작 장애인 친구끼리는 재미있게 받아들여요. 성격이나 피부색이 사람마다 다르듯이 장애도 하나의 개성이에요."
장애를 개성으로 인식하게 되자, 그는 비장애인과 다르지 않은 시각장애인의 삶을 알리고 싶었다. 그래서 2019년 10월 유튜브 채널 ‘원샷한솔'을 개설했고, 현재 1만명 가까이 그의 채널을 구독하고 있다. “유명한 영화평론 유튜버가 시각장애를 소재로 다룬 드라마를 보면서 ‘시각장애인이 옷을 깔끔히 입고너무 잘생겨서 와닿지 않았다’고 말하더라고요. 그러나 장애인도 미(美)에 대한 욕구가 있어요. 그런 편견을 깨고 싶었어요."
영상편집은 대학 기독교 동아리에서 만나 ‘장애학생 도우미’가 돼주었던 김소희씨가 맡는다. 영상에는 김한솔씨가 동대문에서 옷을 쇼핑하는 모습도 나온다. 손끝으로 재질을 느끼고, 판매원에게 색을 물어보면서 깔끔한 스타일의 ‘남친룩’을 완성한다. 최근엔 눈썹 문신을 받은 뒤 너무 진해 보일까 걱정하기도 했다. 종종 들르는 볼링장에선 정확한 자세로 연달아 스트라이크를 작렬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친구들을 위해 계란 찜과 고기요리를 해주고, 편의점에서 장을 보기도 한다. 장애인 친구들과 함께 해외여행을 가거나 놀이공원에 가는 영상까지 보여주는 등 영상 속 김씨의 모습은 비장애인과 전혀 다를 바 없다. 영상에 대한 반응은 나쁘지 않다. “슬프고 힘들 줄 알았던 장애인의 일상을 유쾌하게 풀어내 새롭다”는 댓글이 잇따랐다.
그렇다고 김씨가 마냥 유쾌하진 않다. 김씨가 대학입시를 준비할 당시 EBS 교재 연계율이 70%에 달했지만, 매년 점자책으로 만들어지지 않아 2년 전 교재로 공부해야만 했다. 온라인 강의도 명사가 아니라 ‘이것’, ‘저것’ 등의 대명사로 설명하는 탓에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캠퍼스 생활도 만만치 않았다. 국가고시에선 소리로 문제를 들어야 하는 시각장애인에게 비장애인보다 1.7배 긴 시간을 배정하지만, 대학엔 체계적인 매뉴얼이 없다 보니 순전히 교수 재량에 맡겨져 있었다. “배우고 싶어 들어간 대학인데 마치 고문을 받는 것 같아 입학 초기에는 자퇴까지 생각했어요.”
유튜브 영상에는 일상에서 경험하는 다양한 장벽도 담겨있다. 그는 “시각장애인에게는 남녀 화장실을 구별해 찾아가려고 할 때마다 ‘한쪽으로 가면 천국이지만 다른 쪽으로 가면 경찰을 만난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다”고 말했다. 촉각정보가 담긴 지도인 ‘촉(觸)지도’가 없다 보니, 화장실 가는 게 무척 어려운 일이라는 설명이다. 패스트푸드점 등에서 키오스크 무인 주문기가 늘고 있지만, 음성 서비스가 없어서 발길을 돌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 ATM도 터치스크린으로 돼있어 개인정보인 비밀번호를 친구에게 말할 수밖에 없다. 결국 시설물을 만들거나 시스템을 새로 도입할 때 시각장애인 입장을 좀더 고려했으면 좋겠다는 게 김씨의 바람이다.
이처럼 시각장애인에게 세상은 여전히 불편한 곳이지만, 그에게 장애라는 꼬리표는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클라이밍이나 댄스 등 도전하고 싶은 분야가 많아요. 그래서 ‘장애=부족’이라는 편견을 없애는데 기여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