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6일 오전 3시. 천둥 번개 소리가 나서 잠시 눈을 떴다. 전날 늦게 잠에 들어 처음엔 꿈인 줄 알았다. 8월 실리콘밸리 지역에 천둥 번개가 내리칠 리가 없기 때문이다. 통상 천둥 번개는 “쏴”라고 내리치는 굵은 빗줄기 소리와 동반된다. 그러나 빗소리도 나지 않았다. 다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보니 지난밤 일어난 일이 ‘실제 벌어졌다’라는 것을 알게 됐다. 비는 거의 오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불행한 일이 벌어졌다는 뜻인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처음으로 실제 겪은 것이다.
불행은 곧 일어났다. 이날 북캘리포니아 지역 전역에 내린 ‘마른 하늘의 날벼락’으로 인해 초대형 산불이 났기 때문이다.
이날 이후 72시간 동안 무려 1만2,000번의 번개가 내리쳤다. 사흘 동안 만 번이 넘게 꽂아 내리는 번개에 연방정부 관리는 ‘지옥의 불(fires of hell)’ ‘홀로코스트(holocaust)’란 표현을 했을 정도다.
지난달 25일(현지시간)까지 북부 캘리포니아 산불로 인해 7명이 사망하고 최소 1,200개의 건물이 파괴됐다. 개빈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비상사태’를 선포하며 코로나19와 함께 대화재를 ‘이중 위기(double crisis)’라고 규정했다.
지난해는 4,292건의 화재가 발생해 5만6,000에이커를 불태웠는데 올해는 지금까지 무려 7,002건의 화재가 발생, 140만 에이커(약 5,666㎢)를 태웠다. 서울 전체 면적(약 605㎢)의 9배가 넘는 삼림이 소실된 것이다. 이중 약 120만 에이커는 지난 한 주 만에 불탔다.
이번 화재로 레드우드 나무가 우거져 실리콘밸리 지역 주민들이 아끼는 빅베이슨(Big Basin) 주립공원의 게스트 하우스도 완전히 전소됐다. 스탠퍼드대 후버타워에 낙뢰가 내려쳐서 일부가 깨지기도 했다.
코로나 팬데믹에 지친 지역 주민에게 ‘숨통’ 역할을 하던 200개가 넘는 지역 공원이 산불로 문을 닫았다.
지난 2017년 나파·소노마 밸리를 쑥대밭으로 만든 화재 이후 매년 북부 캘리포니아에 화재가 발생했다. 캘리포니아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산불 6건이 지난 3년간 8만 에이커가 넘는 지역을 파괴, 123명이 목숨을 잃었다. 올해는 지난 2017년 나파·소노마 밸리 재난의 3배 규모로 피해가 났다.
더 큰 불행한 소식이 있다. 아직 산불의 피크가 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화재는 우기가 시작되는 11월 직전까지 매년 9~10월이 피크였다. 제이크 헤스 캘파이어(캘리포니아주 소방국) 샌타클라라 지역 소방서장은 “우리는 지금 거대 화재(Mega Fire) 시대에 살고 있다. 산불이 해를 거듭할수록 악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커티스 제이콥슨 프리몬트 지역 소방서장도 기자화견에서 “2020년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는 ‘전례없는(Unprecedented)’이란 단어다. 전례없는 폭풍, 전례없는 화재가 발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 질병관리센터(CDC)는 미국 성인의 40% 이상이 코로나19 관련 우울증, 불안 및 약물 남용 문제를 겪고 있다고 조사한 바 있다. 실리콘밸리 주민들은 여기에 해고 스트레스와 함께 8월말 들어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서 집에서 일을 하면서 원격수업을 해야 하는 스트레스도 받는다. 여기에 ‘산불 스트레스’가 추가된 것이다.
실제 대형 산불은 지역 주민의 삶에 심각한 피해를 준다. 10만 명이 넘는 주민에 대피령이 내려져서 거주지를 강제로 옮겨야 하는데 코로나19로 인해 딱히 갈 곳도 없는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산불 피해가 없는 지역이라도 현재 실리콘밸리 지역은 ‘제한 정전’이 실행 중이어서 직간접적인 피해를 받고 있다.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가 잡히지 않는 상황에서 샌프란시스코 및 베이 지역(실리콘밸리) 주변에서 벌어진 대형 산불로 공기 질이 나빠졌다.
실리콘밸리 지역 곳곳에서 여전히 집 밖에 나가면 하늘은 흐리고 장작 타는 냄새가 난다. 캠프파이어 할 때 장작 주변에서 나는 냄새가 창문을 열면 나는 것을 상상하면 된다. 코로나19로 다수 주민들이 재택근무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최악의 공기 질로 신음하고 있는 것이다.
캘리포니아는 날씨가 좋기로 유명했지만 이대로 간다면 ‘날씨 좋은 캘리포니아’는 과거 스토리가 될 수도 있다. 현재 실리콘밸리 일대 공기질은 중국 베이징이나 인도 뉴델리보다도 4배나 나쁘다.
한국에서는 매년 봄 황사, 미세먼지 때문에 공기청정기가 집안의 필수 구매 품목이 됐는데 북 캘리포니아에서는 대화재로 인한 공기 질 악화로 공기청정기 구매가 빗발치고 있다. 공기청정기 수요가 폭증하자 지역 코스트코에는 재빠르게 공기청정기를 비치했으며 1인 1대로 수량을 제한했다.
정전도 견뎌야 한다. 지역 전기 업체인 PG&E는 덥고 건조한 날씨가 계속되면서 전력 수요가 폭증, 지역을 돌아가며 단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17년부터 4년 연속 대형 화재가 실리콘밸리 지역을 강타하고 나쁜 공기가 하늘을 덮으면서 이제는 새로운 일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올 가을은 코로나 바이러스 재유행과 함께 대형 화재가 끊이지 않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성인 뿐 아니라 어린 학생들이 더 문제다. 이미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스트레스에 100% 원격 학습을 어렵사리 적응하고 있는데 산불로 인해 정신적, 정서적, 육체적 트라우마가 생기고 학습 능력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란 분석이다. 이미 중요한 일상과 정상을 놓치고 있어서 회복에는 시간이 걸릴 수 있다는 것이다.
샌프란시스코(SF) 클로니클은 “아이들이 스트레스와 두려움에 쌓일 수 있으며 앞으로 사회에 미치는 악영향이 커서 비용이 많이 들 수 있다”고 보도했다. 나딘 버크 해리스 박사는 SF클로니클에 “산불로 인해 많은 아이들이 트라우마 위에 트라우마를 겪는 것을 우려한다”고 분석했다.
‘날씨의 제왕’ 캘리포니아가 날씨로 신음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기후변화가 꼽힌다. 기후변화 자체는 가뭄, 폭염, 산불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갈수록 여름과 가을이 건조해지고 해수면이 상승하는 데다 해안이 침식하면서 점차 과거엔 예측 불가능한 기후를 유발한다.
그동안 대형 화재는 ‘인재’였다. PG&E 등 전력관리 회사가 노후화된 전깃줄을 관리하지 못해 전봇대가 강풍에 쓰러지면서 화재를 일으켜 지역 일대가 완전히 전소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비도 안 오는 번개가 건조한 나무에 내리쳐서 발화되는 것은 자연재해다. 이 같은 사실이 주민들을 허탈하게 한다.
9~10월엔 최고 시속 164㎞ 이상에 달하는 허리케인급 강풍이 불어 화재와 결합되면서 ‘화마’가 됐다. 바람이 부는 방향에 따라 마을이 쑥대밭이 되는 경험을 지난해까지 했다. 올해도 이를 피해갈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개빈 뉴섬 주지사는 민주당 전당대회에 연설에서 “주 전체가 뜨거워지고 건조해지고 있다. 기후변화는 현실이다. 기후변화를 부정한다면 캘리포니아로 오라”고 말하기도 했다.
캘리포니아는 미국 내에서도 기후변화에 가장 선도적으로 나섰는데 앞으로는 중앙집권적 발전 시스템이 아닌 현장 발전 시스템을 연결한다는 개념의 분산발전(Distributed generation)이나 마이크로그리드(microgrids) 도입 등 에너지 및 발전 시스템을 바꾸는 방안도 논의 중이다.
필요는 수요를 낳고 발명을 낳는다. 구글, 페이스북 등 기업가정신이 역사를 만든 경험이 있는 실리콘밸리다. 역대급 재난을 겪는 실리콘밸리가 새로운 혁명의 씨앗을 뿌릴지 주목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