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촌에 간 ‘자연인’ 추일승 “코트 위 스트레스는 잠시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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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31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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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농구 코트를 떠난 지 벌써 6개월. 코트 위 냉정한 승부사였던 추일승(57) 전 오리온 감독은 푸근한 시골 아저씨가 됐다. 강원 횡성의 산촌에 농막을 짓고 ‘자연인’의 삶을 만끽하고 있는 추 전 감독은 “이 곳에 머물면 모든 잡념이 사라진다”며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28일 횡성의 농막에서 만난 추 전 감독은 “오리온 감독을 할 때부터 산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며 “산이 주는 힐링 효과가 확실히 있다”고 말했다. 그는 2003년 KTF(현 KT) 감독을 맡은 이후 긴 시간 코트를 지켰다. 2009년 KTF와 계약 만료 후 잠시 방송해설위원으로 활동하다가 2011년 오리온 지휘봉을 잡았고, 2015~16시즌 팀을 정상에 올려놓으며 ‘무관의 한’도 풀었다. 오리온에서 10년간 공을 들였던 추 전 감독은 2019~20시즌 팀이 최하위로 추락하면서 지난 2월 자진 사퇴했다.

치열한 승부의 세계에서 벗어난 추 전 감독은 본격적으로 전원 생활을 준비했다. 3년 전부터 발품을 팔아 구매한 지금의 동네 야산 인근에 농막을 짓기 시작했고, 5월에 집을 완성했다. 추 전 감독은 “아내의 고향이 원주인데, 다른 곳으로 가자면 안 갈 것 같아 원주에서 멀지 않은 횡성을 주로 공략했다”며 웃은 뒤 “저녁 석양이 물드는 걸 보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고 설명했다.


산촌의 일상 생활은 여유로워 보이지만 추 전 감독은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하다”고 했다. 작은 텃밭에 옥수수, 방울토마토, 고추, 깻잎, 상추 등 농작물 재배에 나무 심기, 마당 앞 디딤돌 및 잔디 깔기 등 할 일이 태산이다. 추 전 감독은 “몸이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일을 하다 보면 모든 잡념이 사라진다”며 “농사는 주민들이 짓는 걸 보고 흉내 내는 수준이다. 요즘 유튜브에 귀농 관련 콘텐츠도 많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최근 임업후계자 40시간 교육 과정 중 20시간을 이수한 상태에서 코로나19 여파로 교육이 중단된 점을 아쉬워했다.

오랜 시간 전쟁터 같은 코트에서 지냈던 추 전 감독은 사령탑들이 받는 스트레스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프로 감독은 선택 받는 자만이 차지할 수 있는 자리지만 성적에 대한 압박감이 늘 따라다닌다. 프로야구 SK의 염경엽 감독은 극심한 스트레스 때문에 경기 중 쓰러지기도 했다.

추 전 감독은 “일단 3연패가 되면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대인 기피증이 생긴다. 5연패 정도 되면 자신을 통제하기 힘든 수준이 된다. 10연패를 해봤는데 그 때는 무아지경이 되면서 ‘될 대로 돼라’는 식이 된다”며 “복기를 하다 보면 ‘왜 이 때 이렇게 했지’라는 생각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이걸 잊어야 다음 경기를 준비하는데 잊혀지지 않는다. 그게 제일 힘들다”고 털어놨다.


지금은 잠시 떠나 있지만 코트는 그래도 언제나 돌아가고 싶은 곳이다. 때문에 추 전 감독의 전원 생활도 ‘주농야독’이다. 낮에는 농사 일을 하고, 저녁엔 농구 공부를 한다. 농막 한 공간엔 농구 관련 서적들로 가득하다. 추 전 감독은 “캄캄해지면 특별히 할 게 없다”며 “미국프로농구(NBA) 경기나 하이라이트 영상을 보고 최근 농구 트렌드를 파악하고 있다”고 밝혔다.

농구에 대한 열망은 유튜브 채널 ‘나는 농구인이다’에서도 풀어내고 있다. KTF, 오리온 시절 제자 박상오와 유튜브 채널을 운영 중인 추 전 감독은 “농구 백과사전처럼 농구에서 많이 쓰는 전술이나, 수비 방법 등을 알려주자는 취지에서 시작했다”며 “그런데 구독자를 늘리려면 재미도 필요하다고 해서 예능적인 부분은 상오가 담당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추 전 감독의 농막 단골손님인 박상오는 “자극적인 요소보다 농구 만의 순수한 매력을 감독님과 함께 알리고 싶다”고 강조했다.


김지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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