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는 현대 한국의 잊혀진 조상이다

입력
2020.08.31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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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 연재]<17>노비랜드

편집자주

한국의 정체성, 역사, 정치, 사상, 문화 등 한국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찾아 온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의 '한국이란 무엇인가' 연재가 이번 글을 마지막으로 당분간 쉽니다. 재충전 뒤 돌아오겠습니다.



지난번 '한국이란 무엇인가' 연재에 유교랜드 방문기를 쓰고 난 뒤, 여러 가지 제안이 필자에게 들어왔다. 유교랜드와 태교랜드 이외에도 방문할 가치가 있는 테마파크가 여러 곳 있으니 가보라는 것이었다.

예컨대 “효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재확립”을 추구하고 “민족 전통 계승과 효 문화 교육에 기여”한다는 대전의 효!월드, “세계 최대의 성 건강, 성교육, 성 문화의 메카”를 표방한 제주도의 건강과 성 박물관, 철원군이 110억원을 투입해서 조성 중인 궁예 태봉국 테마파크 등.

그중 가장 내 호기심을 자극한 것은 음성의 큰 바위 얼굴 테마파크였다. 소크라테스, 공자, 마호메트, 아리스토텔레스, 다보탑, 샤론 스톤, 마르크스, 빈 라덴, 타이거 우즈, 역도산, 최규하, 전두환, 명성황후, 단군상 등이 함께 전시되어 있는 곳이라니, 자못 장관일 것 같았다.

이처럼 각양각색의 테마파크를 알게 되다 보니, 실로 테마파크의 존재는 그 나라에 대해 뭔가 흥미로운 진실을 드러내 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꼭 전국 테마파크 순례 및 인류학적 연구를 해보리라.

그런데 존재만큼이나 부재(不在)도 뭔가 의미심장한 진실을 드러내 주는 법. 유교랜드, 태교랜드, 효!랜드, 큰 바위 얼굴 테마파크까지 있을 정도면, 응당 있을 법한 테마파크인데 기어이 존재하지 않는 테마파크는 무엇일까. 그 테마파크의 부재는 한국에 대해 뭔가 의미심장한 것을 시사하지 않을까.

부재하는 테마파크 중에서 첫손에 꼽을만한 것이 바로 노비랜드이다. 한국 역사에서 노비의 존재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양반이라는 상대적 유한 계층이 있었으니만큼, 전적으로 노역에 시달리는 노비층도 있었던 것이다. 노비의 인구가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해 학자들 간의 확실한 합의는 없고, 또 노비 숫자는 시대별로 증감이 있었지만, 적어도 조선 시대 인구의 30 퍼센트 정도는 되었다고 보는 추정하는 학자들이 많다.

그 막대한 숫자의 세습 노역 인구는 전근대 한국 사회가 굴러가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했던 존재들이다. 서양의 대표적 한국사 연구자였던 제임스 팔레는 1995년에 “한국적 특수성을 찾아서”(“A Search for Korean Uniqueness”)라는 자극적인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는데, 그 주요 논지 중 하나는 노비의 존재야말로 한국사의 특징이라는 것이었다.



제임스 팔레는 한국에 존재한 노비를 기본적으로 노예(slave)로 간주했기에, 그에 동의하지 않는 학자들은 여러 가지 반론을 제기하였다. 특히 노예와 노비의 차이점에 대해서 주목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고, 아울러 노비가 존재했다고 한들 그것을 해당 사회의 핵심적 특징으로 간주할 수 있느냐를 두고 논란이 벌어졌다.

누구의 의견이 옳든 전근대 한국 사회를 운영하는 데는 노비 노동이 필수 불가결했으니만큼, 노비를 주제로 한 테마파크가 하나쯤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양반 연구만큼은 아니지만, 노비 연구도 어느 정도 이루어졌고, 노비를 소재로 한 드라마도 있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만들어 볼 만 하지 않은가, 노비랜드. 샤론 스톤과 빈 라덴을 다루는 테마파크도 있는 마당에 말이다.

노비에 관해 가장 흥미로운 점은, 현대 한국인 개개인과 무관한 존재로서 철저히 대상화되어왔다는 사실이다. 거칠게 말하여, 노비가 조선 시대 인구의 약 30 퍼센트 정도를 차지했다면. 현대 한국인 조상 중에는 대개 노비가 포함되어 있거나 모종의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 한국에서 노비의 자손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 거꾸로 집집마다 자기 집안이 양반 집안이었음을 표방하는 족보가 존재한다. 한국의 족보가 흥미로운 점은 이른바 큰 바위 얼굴 중심으로 가계가 조직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무슨 씨 무슨 공파 몇대손....운운. 즉 조상 중에서 출세한 사람을 골라, 자신이 그의 몇 대손임을 내세우는 것이다. 그 큰 바위 얼굴은 현달(顯達)한 양반이었기에, 대개 노비 주인이었을 것이고, 옛날 노비 주인은 종종 노비를 구타했다.

반면, 특별히 남을 구타하거나 구타당하지도 않고, 집안에서 게으르게 몸을 뒤척이던 인물은 한국 족보의 중심인물이 될 수 없다. 유교랜드에 가면 족보자료를 통해 자신의 선조와 가계를 찾아볼 수 있게 해주는 서비스가 있는데, 그 서비스를 통해 결국 도달하는 정점은 과거에 출세한 큰 바위 얼굴 조상이다.

족보에 관련하여 또 하나의 흥미로운 사실은, 현존 족보의 대부분 혹은 상당수는 위조된 족보라는 점이다. 결코 양반이 아니었던 이들이 양반을 자처하기 위해 족보를 위조하는 일이 19세기와 20세기에 집중적으로 벌어졌다. 어느 한 개인이나 한 지역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 전국에서 광범위하게 벌어진 일이었다.

20세기 전반 한국의 대표적 베스트셀러가 족보였다는 사실 저변에는 이러한 사회사가 깔려 있다. 노비라는 가계를 집단적으로 세탁함을 통해 현대 한국인이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염상섭의 소설 '삼대'는 가짜 족보 탄생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한국사에서 노비는 단순히 신분제 때문에 흥미로운 존재가 아니다. 노비는 집단적인 망각과 무시의 대상이었다는 점에서도 사뭇 흥미롭다. 그토록 많은 노비가 실존했으나, 지금은 노비의 자손(을 표방하는 사람)을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곳이 바로 현대 한국이다. 동시에, 강남의 고급 아파트 대표회장이 관리소장에게 “종놈이 감히!”라고 소리 지르기도 하는 곳이 바로 현대 한국이다.

이러한 배경이 있기에, 시인 서정주가 '자화상'이라는 시에서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고 노래했을 때, 각별한 울림이 있게 된다. 그 시인 서정주도 나중에 그 싯구는 사실이 아니라 문학적 장치에 불과하다고 술회했다고 전해진다.

역사학자 피터 버크는 향후 연구 주제를 제시하는 글에서 기억의 역사와 지식의 역사를 연구할 필요가 있듯이, 망각의 역사와 무지의 역사도 연구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 바 있다. 실로 각 시대는 의도적으로 망각하고자 하는 대상, 그리고 무지의 상태로 남아 있으려는 대상을 가지고 있다. 그 망각과 무지의 대상들은 의외로 그 시대와 장소에 대해 의미심장한 것을 우리에게 말해줄 것이다.

노비랜드는 노비라는 망각과 무시의 대상에 대해서 알려줄 뿐 아니라 애써 그 대상을 망각하고자 하는 이들에 대해서도 뭔가 알려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현대 한국은 자기 조상이 노비였다는 사실을 애써 망각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안동에 있는 유교랜드에 가면, 저명한 양반 출신 유학자들이 마치 열전처럼 소개되어 있다.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등등. 마치 관람객들이 그 양반 출신 저명 유학자들과 동일시하거나 존경하기를 기대하는 듯이 말이다. 그러한 유교랜드와 짝을 이루어, 노비랜드에서는 노비를 열전처럼 소개해보면 어떨까. 그것은 유학자들 열전만큼이나 흥미로운 역사적 배움을 제공해주지 않을까. 그 후보로는 누가 좋을까.

술을 많이 마시다 급사한 것으로 알려진 노비 출신 시인 이단전, 어머니가 노비였던 과학자 장영실, 노비 출신으로 학문적, 문학적 명성을 누린 박인수, 최립, 백대붕, 유희경, 정초부. 반란을 도모한 노비 박업귀, 무인으로 출세한 노비 정충신과 목인해, 큰 재산을 모은 부자 노비 불정과 임복, 신분세탁을 시도했던 노비 반석평과 김의동, 주인에게 재산을 상속해 준 노비 막정.

어디 그뿐이랴. 의병에 참여하여 충노(忠奴)의 칭호를 얻은 노비, 주인에게 맞아 죽은 노비, 주인을 구타한 노비, 노비를 소유한 노비, 노비에게 소유당한 노비, 관청마다 존재했던 관기들, 곡식을 바치고 면천된 노비, 도망간 노비, 도망가다 잡힌 노비, 도망간 노비를 잡으러 간 노비, 주인집 자식 젖먹이다가 정작 자기 자식은 굶겨 죽인 노비, 1894년 노비제도가 공식적으로 폐지되어서 기뻤던 노비, 실직을 우려해서 노비해방이 달갑지 않던 노비, 그리고 큰 바위가 아니라 별 특징 없는 자갈처럼 존재했던 그냥 노비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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