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마 돌아갔네" "프랑스식 인사하자" 사장은 그렇게 '나쁜 손'을 뻗었다

입력
2020.09.05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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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서 성추행' 판결문 27건 분석해보니
황당 수법ㆍ뻔뻔한 해명에 피해자 고통
'비서에게는 함부로 해도 된다?'
상사의 왜곡된 인식이 가장 큰 문제


공교롭게도 피해자는 모두 비서였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성폭행 사건, 그리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의혹 사건 피해자도 여성 비서였다. 성폭력 사건이 여성 비서에게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권력형 사건에 유독 비서가 피해자로 자주 등장하는 것은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배울 만큼 배우고, 깨어있을 만큼 깨어있던 사람조차 누군가의 상사가 되는 순간, 아랫사람에 대해 왜곡된 인식을 가질 수 있음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사건의 한복판에는 상사와 업무적으로 자주 접촉할 수밖에 없던 비서라는 직업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비서들은 그 동안 어떤 피해를 입었던 것일까. 가해자는 어떤 사람들이었고, 범행 후 어떤 변명을 해왔던 걸까. 한국일보는 법원 판결서 인터넷 열람 서비스를 통해 최근 5년간 비서를 대상으로 한 성추행 사건들을 살펴봤다. ‘비서’ ‘추행’ 키워드로 검색된 2015년부터 올해 8월까지의 선고 사건 가운데 실제 비서 성추행 혐의로 유죄 판결이 내려진 1ㆍ2심 판결문 27건을 들여다봤다. 판결문에는 남성 상사가 여성 비서를 바라보는 비뚤어진 시각과 황당한 범행수법이 드러나 있었다.



5060 남성이 2030 사회초년생 추행

비서를 상대로 한 성추행 사건의 가해자로는 기업 대표가 19명으로 제일 많았다. 직장 상사와 시의원 등도 가해자 리스트에 있었다. 가해자 대부분은 50대 남성이 많았고, 60대와 70대도 있었다. 반면 피해자는 모두 여성이었고, 대부분 10대에서 30대의 사회초년생이었다. 실습생으로 일하던 청소년이 피해를 입기도 했다.

가해자의 행태를 보면 피해자들의 고통과 충격은 매우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비서보다 마흔 살이나 많은 기업 회장은 입사한 지 4개월밖에 안 된 20세 피해자에게 “고생이 많으니 밥을 사주겠다”며 저녁식사 자리를 마련하고 술을 권한 뒤 가슴을 만졌고, 72세 기업 회장은 찻잔을 가지고 집무실로 들어온 24세 비서에게 강제로 입을 맞추고 엉덩이를 만지기도 했다. 69세 언론사 회장은 아침 보고를 하는 26세 비서의 허리를 껴안아 포옹했고, 50대 목사는 아이패드가 고장났다며 부른 30대 비서의 신체를 갑자기 만졌으며, 50대 기업 대표는 20세 비서에게 “외롭다”고 말하며 피해자 손을 잡고 껴안았다.

가해자 대부분은 부하 직원인 비서에 대해 왜곡된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함께 일하는 동료가 아니라, 사적으로 함부로 대해도 되는 존재로 인식한 경우가 많았다. ‘비서와 대표는 인간적으로 친해져야 하니까 오빠라고 불러라’라고 태연히 말하는가 하면, ‘(무릎과 종아리를 쓰다듬으며) 나가서 봉사활동도 하는데 노인에게 봉사했다고 생각하라’고 떠드는 등 어처구니 없는 행태를 보이기도 했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가해자는 피해자를 동등한 인격체로 보지 않고 ‘나이 어리고 직급도 낮은 너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다’는 왜곡된 인식을 갖고 있다”며 “형식적으론 개인의 일탈이지만, ‘지위가 높은 사람은 그래도 된다’고 묵인하는 분위기가 작용한 측면도 있어 사회적 문제이기도 하다”고 진단했다.

"프랑스식 인사하자" "치마가 돌아갔네"

업무적 상하관계에 기반한 성적 괴롭힘의 유형은 다양했다. 가해자들은 “몸이 왜 이렇게 차갑니”라며 피해자의 손을 만지는 '고전적' 수법은 기본이고, 상상을 초월한 방법도 동원했다. 중견기업 대표인 A씨는 2013년 서울 강남구 사무실에서 비서로 일하고 있던 피해자(38)의 뒤로 다가가 갑자기 허리를 잡고 피해자가 입고 있는 치마를 돌렸다. 그러면서 “내가 이런 걸 보면 고쳐 줘야 하는 성격이라 그래,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마”라고 말했다.

느닷없이 프랑스식 인사를 하자며 20대 계약직 직원을 추행한 상사도 있었다. '비주(bisou)'라고 불리는 프랑스식 인사는 만나거나 헤어질 때 양쪽 볼을 맞대며 ‘쪽’ 소리를 내는 인사법이다. 사장 비서팀 차장으로 근무하던 B씨는 2014년 강남구 사무실 내 탕비실에서 '비주'를 핑계 삼아 같은 비서팀 직원인 피해자(28)를 끌어안고 양쪽 볼에 입을 맞췄다. 실제 비주는 볼에 입을 맞추진 않는다. B씨는 악수를 청하며 피해자 손바닥을 손가락으로 긁는가하면, 뒤에서 피해자를 끌어안고 배와 가슴을 만지기도 했다. 재판부는 B씨의 이런 행위에 대해 “업무상 지위를 이용해 장기간 여러 차례에 걸쳐 피해자를 추행하고, 성적 수치심을 일으키는 문자를 보내 피해자의 정신적 고통이 매우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B씨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고, 40시간의 성폭력치료강의 수강 명령도 받았다.

영농조합법인 대표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20대 비서에게 겁을 주며 성추행을 했다. 2017년 가해자 C씨는 피해자(25)와 함께 회사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중 일부러 엘리베이터 스위치를 조작해 불을 켰다가 끄기를 반복하며 “귀신이다”라고 말하며 겁을 먹게 했다. 피해자가 놀라 구석으로 도망치자 C씨는 피해자에게 몸을 밀착했으며,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서 15분 정도 갇히게 되자 구석에 앉아 있는 피해자에게 다가가 양팔과 정강이를 만졌다. C씨의 만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피해자를 자신의 승용차에 태운 뒤 허벅지를 만지면서 “다른 여자들은 물살인데 너는 근육이 있구나”라고 말하는가 하면, “당구 치는 자세를 교정해 주겠다”며 피해자의 엉덩이를 치기도 했다. 재판부는 C씨에게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고, 160시간의 사회봉사와 40시간의 성폭력치료강의 수강 명령을 내렸다.


"친근감 표시였다" 기막힌 변명들

가해자는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잘못을 시인하고 반성하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았다. 2018년 술에 취해 잠든 25세 여성 비서를 성추행했다가 유죄 판결을 받은 직장 상사 D씨는 “피해자가 계속 구토해 응급처치 차원에서 배를 문질러 줬고, 피해자를 편하게 해 주려고 바지 버클을 풀었다”며 책임을 회피하려고 했다. 비서는 사건 직후 충격을 받고 회사를 그만뒀다.

법정에 제출한 반성문도 변명으로 가득했다. 2015년 인천의 중소기업에서 간부로 일하던 E씨는 비서인 피해자(21)의 가슴 등을 만져 유죄를 선고받았는데도 ‘피해자와 격의 없이 지내왔다. 상하 관계가 나름 친밀했다고 생각했다’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며 잘못을 뉘우치지 않았다. 회식 자리에서 비서의 허벅지를 만진 기업 대표 F씨도 “사적 친분으로 편하게 대할 수 있는 관계여서 친근감을 표시하다가 신체 접촉이 발생한 것일 뿐”이라며 제대로 반성하지 않았다.

더 뻔뻔한 사례도 있다. 서울 소재 중소기업 대표인 G씨는 2015년 수습 수행비서로 일하던 피해자(25)를 개인 오피스텔로 불러 강제로 추행하며 성관계를 시도했다. 2017년 유죄 선고를 받은 G씨는 “아빠가 딸 (같은 비서의) 엉덩이도 못 만지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펜스룰'은 올바른 해법 아냐

여성 비서를 향한 몹쓸 짓이 이어지는 배경에는 비서직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가 영향을 주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 비서직을 자극적으로 묘사하고, 사장과 여성 비서와의 로맨스가 단골 소재가 되면서, 대중에게 비서에 대한 잘못된 인상을 심어 주고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성범죄를 예방하는 대안으로 여비서와는 채팅을 못하게 하거나, 비서직에 남성만 뽑자는 식의 ‘펜스룰(여성과 거리두기)’을 주장하는 목소리는 올바른 해법이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최선혜 한국여성의전화 여성인권상담소장은 “불편하니까 배제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엄연한 차별”이라며 “누구나 안전하고 자신의 일을 잘 수행할 수 있는 조직 문화를 만드는 것부터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수정 교수도 “성차별을 겪지 않고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업일수록 평판도 좋아지고 생산성도 높아진다”고 강조했다.

채지선 기자
이혜인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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