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타비아 버틀러(1947~2006)의 SF소설 ‘킨’(1979)은 시간여행으로 인종과 젠더 문제 등을 파고든다. 1970년대 후반 미국 서부에 살던 여주인공 다나가 갑자기 1800년대 초반 동부 메릴랜드주로 순간이동을 하는 사연을 통해서다. 다나가 흑인 노예가 당연시되던 시공간에 떨어졌음을 절감하게 만드는 건 흑인을 멸칭하는 단어 ‘N워드’다. 스페인어 ‘느에그로’(Negro)에서 유래한 말로 원래 검정을 의미했으나 노예제를 거치면서 흑인에겐 모욕적인 표현이 됐다.
□‘N워드’만큼 흑인의 분노를 일으키는 게 ‘블랙 페이스’다. 백인 배우들이 얼굴을 검게 칠하고 흑인 노예를 우스꽝스럽게 묘사한 19세기 미국 무대극 민스트럴쇼에서 유래했다. 흑인은 무대에 오르는 것조차 금지하던 시절에 흑인을 지저분하며 열등한 존재로 묘사하고 농장 노예의 춤을 흉내내 백인들의 웃음을 불러냈다. 흑인들이 분통을 터트리고도 남을 일이다. 블랙 페이스가 심각한 인종차별 행위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다.
□미국 배우 알 졸슨(1886~1950)은 최초의 유성 영화 ‘재즈 싱어’(1927)에서 주인공 재키를 연기하며 블랙 페이스로 분장했다. 유대계인 재키는 집안 반대를 이겨 내고 흑인들의 영역이었던 재즈 가수로 성공한다. 졸슨의 블랙 페이스 분장은 소수자가 다른 소수자가 되고 싶은 열망을 나타내기 위한 행위이기에 문제 삼는 이들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졸슨의 삶을 그린 영국 뮤지컬 ‘졸슨 앤 코’가 2009년 무대에 올랐을 땐 졸슨의 상징인 블랙 페이스 분장을 의도적으로 배제했다.
□어떤 표현이든 역사적 맥락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느에그로’는 원래는 가치중립적이었던 단어에 불과했다. 나치의 하켄크로이츠도 고대부터 동서양에서 보편적으로 쓰이던 문양을 활용한 것이지만 1940년대 이후론 악의 상징처럼 됐다. 일제강점기의 만행을 겪었기에 한국인에게 욱일기의 의미는 분명하다. 역사의 상처가 큰 한국인이라면 박해받던 이들의 목소리에 더 귀 기울여야 한다. 가나 출신 방송인 샘 오취리를 둘러싼 최근 논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