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는 살아서 자신과, 또 사랑하는 이와 이별하는 질병이다. 미하엘 하네케 감독의 영화 '아무르(Amour)'는 그 상심-상실의 감정을 잘 담아 2012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탔다. 치매로 기억이 흐려지던 아내는 이내 섬망의 세계를 넘나든다. 판단이 엉키고, 몸이 굳고, 곱던 얼굴도 고통으로 일그러진다. 그렇게 점점 낯설어지는 아내 곁을 지키는 남편의 늙은 몸이 지쳐간다. 마음도 한결같지 않다. 때로는 아내가 야속하고, 화도 나고, 미워지기도 한다. 그렇게 변해가는 자신도 밉다. 치매는 그렇게 가장 곁에 있는 사람의 자아도 훼손할 수 있다. 마침내 남편은 아내를 살해한다. 그 선택이 서로를, 스스로를 더 잃지 않고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일지 모른다고, 영화는 넌지시 말한다.
1991년, 51세 영국인 맬컴 포인턴(Malcolm Pointon)이 치매 진단을 받았다. 27년을 함께 산 동갑 아내 바버라(Barbara)는 이듬해 직장을 그만두고 간병에 전념한다. 영화의 그들처럼 둘도 음악가였다. 대학강사 겸 교사였고, 무엇보다 서로에게 각별했다. 하지만 병과 간병의 양상은 영화와 또 달랐다. 애틋한 낭만은 허구였다. 그리 순하던 남편은 성미가 거슬리면 컵을 던졌고, 아내의 머리끄덩이를 움켜쥐는 난폭한 짓도 서슴지 않았다. 바버라의 빈 술병도 쌓여갔다. 집에서 요양병원으로, 다시 집으로. 바버라는 2007년 남편이 숨을 거둘 때까지 만 16년을 버텼다. 남편을 보낸 뒤 그는 "(남편뿐 아니라) 내게도 해방이었다"고 말했다. 그 모든 과정을 저명한 감독 폴 왓슨(Paul Watson)이 "잔혹하리만큼 정직한(brutally hones)" 2편의 다큐멘터리로 제작해 99년과 2007년 영국 iTV로 방영했다. 바버라는 "이 질병을 무지와 두려움의 그늘에서 끄집어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영국의 의료비는 원칙적으로 전액 국가 재정이 부담한다. 1942년 저 유명한 '베버리지 보고서'의 보편복지 이상과 48년의 국민보건서비스(NHS)법에 따른 보편의료무료서비스다. 치매 치료와 입원 요양 비용, 간병사(care worker) 비용도 당연히 국가가 댄다.
하지만 간병사와 별도로 바버라처럼 24시간 환자 곁을 지켜야 하는 가족은 일도 못하고 쉬지도 못하며 오직 헌신해야 하는 존재였다. 바버라는 그 현실이 부당하다고, 국가의 약속과 어긋난다고 생각했다. 돌봄노동으로 수입이 끊겨 가난해질 수도 있고, 젊은 간병인(carer)이라면 공부나 경력이 단절될 수도 있고, 직장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 2007년 기준 영국의 비직업 간병인은 약 70만 명으로 그중 80%가 노동 연령대였고, 직장을 그만둔 이도 58%였다. 2025년이면 가족 돌봄 노동에 전념해야 하는 시민이 100만 명을 넘어서리라 예상됐다.
바버라는 치매 관련 단체 및 학회와 함께 NHS와 싸우고 정치인들을 설득했다. 2004년 영국 정부와 NHS는 가족 친지 등 자격증 없는 간병인의 쉴 권리와 돌봄노동의 경제적 가치를 인정했다. 바버라는, 영국의 모든 치매 환자와 보호자는 덜 지치고 덜 쪼들리며 각자의 삶과 존엄을 지탱할 수 있게 됐다. 남편을 보낸 뒤 바버라는 자신의 경험을 세상에 알리며, 치매 관련 의료기관 및 생활시설 서비스 개선을 위해, 환자 보호자 권리 및 사회적 공감과 연대를 위해 국가 위원회와 여러 단체에서 봉사했다. 바버라 포인턴이 6월 21일 별세했다. 향년 80세.
바버라는 잉글랜드 중부 스태퍼드셔 스토크온트렌트(Stoke-on-Trent)에서 오르간 제작자 겸 조율사 아버지와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어머니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부모는 딸의 피아노 레슨 비용만큼은 아끼지 않았다. 중등여학교인 티슬리 호 아카데미(Thistley Hough School) 재학 중, 작곡과 피아노를 공부하던 맬컴을 만났다. 맬컴이 57년 한 콘서트에서 연주하던 중 돌풍에 악보가 날아가버린 일이 있었다. 바버라는 그걸 주워 맬컴 곁에서, 연주가 끝날 때까지 악보를 잡아줬고, 그 인연으로 둘은 연인이 됐다. 나란히 버밍엄대를 졸업한 뒤 교사와 강사로 일하며 64년 결혼했고, 바버라가 호머턴(Homerton) 칼리지 선임강사(senior lecturer)로 자리를 잡으면서 69년 케임브리지 트리플로(Triplow)로 이사했다. 부부는 교육자로서 지역사회 음악 봉사자로서 큰 존경을 받았고, 아들 둘을 길러 독립시켰고, 성실히 저축하며 노후를 준비했다.
치매 징후가 처음 나타난 건 1989년이었다. 한 오페라 가수의 음반 녹음 반주를 하던 맬컴이, 10분이면 끝낼 일을 전 같지 않게 잦은 실수로 오전을 다 허비한 거였다. 케임브리지에서 집까지 늘 다니던 8마일 길을 운전해 오는 데 세 시간 넘게 걸린 적도 있었다. 1차진료기관 의사(General Practitioner)는 우울증 진단을 내렸다. 엉뚱한 진단- 처방으로 맬컴의 증상은 더 빠르게 나빠졌다. 그가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건 2년 뒤인 1991년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그는 케임브리지대 강의를 중단했다. 어느 날 귀가한 바버라는 레인지 위에서 빈 팬에 달궈지고 있는 걸 보게 된다. 마을 한 초등학교 교장이던 바버라는 얼마 뒤 사표를 냈다. 투병-간병이 시작됐다.
NHS가 비용을 대는 간병사는 두 명이 아침부터 저녁 7시까지 격주 교대로 맬컴을 돌봤다. 다만 그들은 알츠하이머 환자 전문 간병사가 아니었다. 첫 8개월 사이 무려 14명이 맬컴을 못 견뎌 그만뒀다. 병세는 꾸준히 악화했다. 실금(失禁)이 잦아졌고, 음식도 제대로 못 삼킬 만큼 몸이 둔해졌고, 말도 어눌해졌고, 쉽사리 난폭해졌다. 바버라의 일도 고통도 그만큼 늘어났다. 남편이 뭘 원하는지, 어떻게 해줘야 할지, 내일 어떻게 달라질지 알 수 없었다. 조언도 제각각이었다. 훗날 바버라는 그 과정을 '미로 탐사'에 비유했다. 바버라는 직장뿐 아니라 여가도, 친구도 함께 잃었다. 예금 잔고도 점점 줄어갔다. 그는 "어떨 땐 남편이 밉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 긴 마모의 과정을 왓슨은 부부 동의를 얻어 만 4년간 '관찰 다큐 형식(fly-on-the-wall style)'으로 촬영, 1999년 '맬컴과 바버라: 러브스토리'란 제목으로 방영했다. 바버라는 '살아 있는 남편과 한 집에 살면서 내가 과부가 된 느낌'이라고, 치매는 배우자에겐 '무과실 이혼(no-fault divorce)' 같은 거라고 말했다.
바버라는 1998년 맬컴을 요양시설(care-home)에 들였다. 하지만 맬컴의 몸과 정신은 집에 있을 때보다 더 빨리 둔해지고 굳어져갔다. 바버라에 따르면, 낯선 환경도 문제였겠지만 "입소자 관리 편의를 위해" 처방하는 지나치게 강한 약 때문이기도 했다. 바버라는 그걸 "화학적 몽둥이질"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18개월 만에 남편을 다시 집으로 데려왔다. 집에 온 지 일주일 만에, 잘 서지도 못하던 맬컴은 조금씩 걸을 수 있게 됐다. 바버라는 "집에 들어선 맬컴이 벽에 걸린 자기 그림을 물끄러미 응시하더니 빙그레 웃으며 'home'이라 하더라"고, "그건 안도와 해방감의 표현이었다"고 말했다. 바버라는 간병사와 함께 남편을 돌보며 2000년 4월부터 약 14개월간 5주에 닷새씩 말콤을 시설에 보내고 휴식을 취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설로 향하던 차 안에서 맬컴이 구토와 함께 공황 발작을 일으켰다. 바버라는 도로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2001년 말 바버라의 싸움이 시작됐다. 그는 치매 환자를 돌보려면 최소 두 명의 간병 인력이 24시간 필요하다며, 가족 친지 등 간병인의 돌봄노동을 인정하고 그들의 쉴 권리를 보장하라고 주장했다. NHS 측은 '5주마다 6일씩 하루 3시간 반 간병사 인건비를 추가 지원하겠다'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바버라는 이듬해 1월 상급기관인 보건부에 청원했고, 5월 소송을 제기했다. 여러 치매 관련 학회와 단체가 바버라를 지원했다. 2004년 항소법원은 바버라의 손을 들어주며 'NHS는 요양시설과 병원뿐 아니라 가정 간병인(nursing care at home)에게도 동등한 지원을 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그해 '간병인 동등 기회 보장법(Carers Equal Opportunities Act)'이 제정됐고, 2007년 고든 브라운 노동당 정부는 '정부 상설 간병인 권리 위원회'를 설립했다.
바버라는 "치매는 비디오를 거꾸로 재생하듯" 삶의 시간이 뒤집혀 흐르는 것 같더라고 말했다. "역피라미드를 생각해 보세요.(...) 치매는 역피라미드의 윗부분을 공격하며 최근 기억과 지식과 기술부터 망가뜨리지만, 바닥에 있는 환자의 정체성과 영혼의 정수는 마지막까지 남습니다." 그는 "불행히도 간병인들은 환자 증상이 심해져서 말을 못하고 못 알아듣고 '사고'를 덜 치고 그래서 손이 덜 가면 좋아하지만, 내가 경험한 한 그럴수록 환자는 감각적으로 더 세심한 배려와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맬컴은 말은 못해도 원하는 음식이 있었고, 바버라의 요리 냄새를 반겼고, 마지막까지 음악을 사랑했다. "라디오에서 그가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나오면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그건 슬픔이 아니라 사랑과 행복의 눈물이었어요." 바버라는 "남편의 치매는 (피라미드 바닥에 놓였던) 그의 참모습을 볼 수 있는 특권을 내게 선사했다"며 치매를 몰라 남편과 자신을 힘들게 했던 과오를 반성하고 후회했다. 남편을 자기 기준에 맞춰 아이 다루듯 으르고 달래고 짜증을 부렸지만 그건 옳지 않았다고, 야단치고, 반박하고, 정상(내 기준)으로 되돌리려 해서는 안 된다고, "결코 다시는 정상으로 되돌릴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바버라는 다큐와 강연 외에 법과 정책, '치매 환자 간병 자료집(2011)' 제작에도 열성적으로 가담했다. 영국 왕실은 2006년 그에게 훈장(MBE)을 수여했다.
왓슨의 다큐는 맬컴이 온전한 정신이었다면 거부했을 수도 있는 모멸적인 장면들까지 여과없이 방영했다. 바버라의 빈 술병과 성생활 같은 민감한 문제도 건드려 부적절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맬컴이 숨지기 직전까지 약 11년을 촬영해 만든 두번째 다큐('맬컴과 바버라: 사랑의 작별')에서는 코마 상태의 맬컴을 마치 숨을 거둔 것처럼 묘사해 왜곡 시비에 휘말리기도 했다. 하지만 다큐는 그 어떤 영화나 드라마도 보여주지 못한 치매의 진실을 충격적이고도 감동적으로 전달했다.
치매는 세계보건기구(WHO) 추산 현재 세계인 약 5,000만 명이 앓고 있고, 매년 1,000만 명 가까이 실로 무서운 속도로 환자가 늘어나는 질병이다. 수명이 상대적으로 긴 선진국 치매 유병률이 높아 미국은 65세 이상 노인의 13.9%(2012년 기준), 한국은 10.3%(2019년 기준, 79만여명)가 치매 환자로 추정된다. 한국 정부는 2017년 이른바 '문재인 케어'의 대표 복지정책으로 '치매국가책임제'를 선언했다. 보건소와 병원 치매의료센터를 확충하고, 치료 및 요양 환자 부담을 경감한다는 게 골자였다. 가정 간병사 비용 및 가족 돌봄노동 지원에 대한 내용은 아예 없었다. 그나마 신설된 치매안심센터도 전문인력이 충원되지 않아 제 기능을 못한다는 지적이 2019년 국정감사에서 제기됐다.
바버라의 성취는 가족 돌봄노동에 시간과 체력을 갈아 넣던 영국 간병인과 치매 환자에게 크나큰 축복이었다. 그리고 치매 요양 복지에 관한 한 갈 길이 먼 한국과 같은 나라의 환자(가족)에겐 아득한 격차를 새삼 확인하게 했다. 모든 요양병원과 생활시설 운영 실태가 바버라의 주장 같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시설에 배우자나 부모를 입소시킨 이라면 죄책감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국가 및 공동체가 함께 져야 할 책임이고 죄의식이다.
2018년 바버라는 급성 알츠하이머 치매 진단을 받고 케임브리지셔의 치매 전문 풀번(Fulbourn) 병원에 입소했다. 자신이 병원 시설 설계 자문을 맡아 치매 환자를 위해 조성한 원형 산책로 정원을, 기억을 잃은 그가 걸었다. '코로나19(Covid-19)' 사태로 록다운이 시작된 3월 이후 그는 가족을 만나지 못했고, 단식 끝에 별세했다.